“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내면을
평생 궁금해하기만 하다 끝나버린 건지도 모릅니다.
p.378
”
세상 끝에서 다시 쏘아 올린 희망의 손길,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작가의 첫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은 더스트로 인해 멸망한 세계와 그 세계를 견디고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섬세한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살 수 없다면』을 통해 작품상을 인정받은 김초엽 작품이라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득 안고 읽었습니다. 지구, 세상, 멸망, 과학, 생명, 인간, 우정, 사랑, 관심. 더스트로 멸망한 세계를 무대로 김초엽 작가는 우리에게 여러 방향에서 수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수 씨도 당신을 결코 잊지 않았다는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 지수 씨는 식물이 잘 짜인 기계라는 사실을 자신에게 알려준 사람에 대해 말해주곤 했어요. 정원에서 허공에 흩어지던 푸른빛을 지켜보던 지수 씨를 보면서, 저는 그렇게 한 사람의 평생을 사로잡는 기억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죠. p.379”
『지구 끝의 온실』은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스바나, 프림 빌리지, 지구 끝의 온실
2129년, 더스트생태연구센터의 연구원 아영은 식물생태학자입니다. 그녀는 느리지만 멀리 뻗어나가는, 강원도 해월에서 비정상적으로 번식하는 덩굴식물 모스바나의 비밀을 파헤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 자신의 이웃이었던 이희수 할머니의 정원에서 본 풍경을 떠올리게 됩니다. 잡초가 무성한 정원에서 푸른빛을 내는 풍경, 아영은 그 장면을 지금껏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으며 자신을 이 세계로 발 디디게 된 배경이라고 소개합니다.
“아양 씨의 추측이 맞아요. 모스바나는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었어요. 제대로 된 약조차 아니었고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약이라고 사람들이 믿게 만들어야 했어요. 당신이 추정한 것처럼 모스바나는 멸망의 시대와 긴밀한 관련이 있지요. 하지만 그건 아영씨가 예상한 방식대로는 아니랍니다. p.109”
나오미와 그의 언니는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내성이 없는 존재는 모두 죽게 만드는 더스트 시대를 살아낸 사람입니다. 실험 대상이었던 두 사람은 돔을 씌워 도시를 만들고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나쁜 짓도 서슴치 않는 사냥꾼을 피해 도피처를 찾게 되고 그들이 찾게 된 곳이 바로 프림 빌리지입니다. 프림 빌리지, 그곳에 리더인 지수씨와 언덕 위의 온실 속의 식물학자 레이첼이 있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잘못된 게 있어. 시작부터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어느 순간 꼬여버린 걸 수도 있지. 아마도 그건 내 실수였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그냥 되는 데까지 책임을 지려고 할 뿐이야. p.192”
마지막 장은 지구 끝의 온실로, 더스트가 종식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일에 대해 나오미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나씩 조각을 맞춰나가는 부분입니다. 아영은 증언을 바탕으로 데이터를 확보하고, 확인되지 않는 진실을 찾기 위해 직접 몸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끝내 과학과 기억과 마음이 어우러진 어떤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식물들은 아주 잘 짜인 기계 같단다. 나도 예전에는 그걸 몰랐지. 나에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걸 알려준 녀석이 있었거든.” 잠시 뒤에 제한이 풀렸고 아영은 떠오른 이름을 써넣었다. 그러자 화면에 뜬 입력창이 사라지고 메시지가 떴다. (중략) 잠긴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는 ‘레이첼’이었다. p.275”
사람의 마음을, 돋보기를 가지고 세밀하게 들여다본 기분을 읽는 내내 느꼈습니다. 식물학자라는 캐릭터도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굳이 저렇게까지 매달릴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일을 누구보다 깊게 파고드는 모습에서 우리의 마음속에 숨겨진 본성, 심리를 떠올렸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경험한 탓일까요. 더스트라는 재앙이 생소하지 않았고, 재앙을 대처하는 모습과 희망의 불씨를 지켜나가는 모습에서 과학이 아닌 삶, 그 자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되묻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지구, 멸망, 세계가 아닌 사람, 관심, 약속, 우정, 사랑으로 다가온 『지구 끝의 온실』을 덮으며 나의 온실, 내 마음 가장 밑바닥의 온실이 궁금해졌습니다. 온기를 잘 유지하고 있는지, 무엇이 보관되어 있는지 말입니다.
from 윤슬작가
“이 소설을 쓰며 우리가 이미 깊이 개입해버린, 되돌릴 수 없는,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곳 지구를 생각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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