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게 기쁜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
어떤 소설은 책을 덮는 순간, 마음 한가운데 작은 불씨를 지핀다. 유은실 작가의 신작 『순례주택』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청소년 소설이지만 어른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아니, 어쩌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이라면 누구나 꼭 한 번 읽어보아야 할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순례주택』은 “약간은 막 나가는” 수림이네 가족(수림이는 이들을 ‘1군’이라 부른다)이 쫄딱 망한 뒤, 할아버지의 옛 연인이 운영하는 ‘순례 주택’에 얹혀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립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지만 허영심만은 가득한 엄마, 라면조차 못 끓이는 공부밖에 모르는 언니 미림, 부모와 누나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아빠. 이들이 수림이의 1군 가족이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외할아버지와 함께 순례주택에서 살아온, 75세 순례 씨의 ‘최측근’인 16세 수림이가 있다.
순례 씨는 평생 때를 밀어 재산을 일군 세신사이자, ‘때탑’의 건물주. 자신의 이름을 ‘순례(順禮)’에서 ‘순례(巡禮)’로 개명하고,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처럼 살고 싶다고 말하는 괴짜다. 그녀의 인생 3대 고민은 ‘썩지 않는 쓰레기’, ‘이산화탄소 배출’, ‘남는 돈’. 언뜻 이상해 보이지만, 그녀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수림아,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
수림이는 순례 씨와 함께 지내며 서서히 ‘좋은 어른’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독자 역시 책 속에서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된다.
“순례 씨 있잖아. 나는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꼭 태어난 게 기쁜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
“왜?”
“태어난 게 기쁘니까, 사람으로 사는 게 고마우니까, 찝찝하고 불안한 통쾌함 같은 거 불편해할 거야. 진짜 행복해지려고 할 거야. 지금 나처럼.”
『순례주택』은 수림이와 순례 씨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등장인물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독자에게 말을 건다. 삶에 대한 책임과 의미,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중에서도 중심은 ‘1군’들이다. 숫자, 스펙, 평수, 브랜드로 사람을 평가하는 수림이의 가족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수림이의 따가운 시선은 독자에게도 묻는다.
“누가 누가 더 어린가 내기하는 게 아니라면,
누가 누가 더 어른인가, 좋은 어른인가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거 아닐까?”
소설 속 또 하나 인상 깊은 물건은 바로 ‘줄자’다. 순례 씨가 마지막 남자, 그러니까 수림이의 외할아버지가 남긴 선물로 1군들이 원더 그랜디움에서 순례주택으로 이사하며 치수를 재고 불필요한 짐을 줄이는 데 쓰였던 그 줄자에는 함축적이면서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기에 잠시 머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던 기억이 난다.
‘나의 줄자는 무엇을, 어떻게 재고 있을까?’
‘그 줄자는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까?’
내 줄자가 누군가를 평가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루하루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채는 도구였으면 좋겠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가르치기보다 “충분히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요구보다는 감사를 표현하는 삶을 잴 수 있는 그런 줄자 말이다. 또다시 똑같은 질문이 찾아든다.
“나는 지금, 좋은 어른이 되고 있는 걸까?”
윤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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