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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Jun 09. 2023

죽음으로써 살아가기

옛날에 목동은 양이 늑대에게 잡아먹힐까봐 겁에 질려 잠을 이루지 못할 때마다 양을 한 마리씩 세고는 했대. 그렇게 한 마리, 한 마리 우리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잠에 들었다는거야. 자신을 안심시키는 것을 하나씩 세면 잠에 들 수 있는 걸까? 요즘 나는 양을 대신해 사과씨를 세며 잠에 들어. 사과씨 1개, 2개, 3개…그렇게 100개까지 세다가 잠들면 꼭 사과씨를 다 삼켜버린 것만 같아. 사과씨 100개를 한 번에 삼키면 죽는다고 하더라. 아마 사과씨에 있는 독성 때문이겠지? 어떤 독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진 모르겠어. 그래도 사과씨를 삼키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난 후로는 조금 안심이 돼.

한가로운 대낮에 죽은듯이 누워서 천장의 무늬를 본 적이 있니? 아니면 벽지의 볼록 튀어나온 이음새나 조명의 조악한 부품을 본 적 말이야. 그런 걸 보면서 이렇게 아무것도 안해서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거구나 생각해. 살아버려서 삶을 버리게 되는 그런 인생 말이야. 그때 손 안에 사과씨를 가득 쥐고 있는 상상을 해. 그걸 한 움큼 삼켜버리면 내가 이 삶을 언제든지, 얼마든지 끝낼 수 있다는 감각은 조금 위안이 돼. 그리고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상상해.


일본에 떠도는 괴담 중에 기괴할 정도로 사람과 흡사해서 유명해진 구관절 인형이 있는데, 그 인형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인형을 주웠던 사람들은 모두 사고사나 원인불명으로 죽었기 때문이래. 그 인형이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인터넷에서는 한 폐가에 버려져있다는 소문이 떠돌더라. 나는 눈을 감고 그 폐가로 들어가는 상상을 해. 바닥부터 천장까지 쓰레기가 가득 차 있고 썩은내가 진동을 해. 그 집에서 시체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아. 발을 디딜 곳이 없어서 쓰레기를 바스락 바스락 밟으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발을 디딜 때마다 바퀴벌레일지, 지네일지 다리가 많은 벌레들이 사라락 움직이는 게 보여. 내 몸을 타고 기어올라오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 소름이 돋다가도 아무렴 나는 저주받은 인형을 주울건데 무슨 소용인가 싶어. 복도를 지나서 방이 세 개가 보이는데 어느 방으로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가장 가까운 방으로 걸어 들어가. 언뜻 사람의 손이 보인 것 같기 때문이야. 쓰레기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기다란 손가락. 나는 거길 향해서 쓰레기를 헤치며 허우적 허우적 걸어들어가. 드디어 쓰레기 더미 속 손가락 앞에 섰어. 내가 찾던 저주받은 관절 인형인 것 같아. 인형을 꺼내려니 먼지가 풀럭풀럭 날려서 기침이 나오고, 나는 낑낑대면서 그 인형을 꺼내. 키가 작은 내가 들기에는 좀 큰 것 같지만 어쨌든 이상한 열망 하나로 그 인형을 꺼내오는 거야. 인형의 눈 부분은 아주 까맣게 칠해져 있어. 무시무시한 비밀과 저주를 품고 있을 것만 같아. 이제 더럽고 먼지 날리는 그 인형을 품에 안아들고 터덜터덜 폐가를 걸어 나와. 그럼 나는 어디로 가야할까? 어디로 가면 가장 저주받은 사람처럼 죽을까? 그냥 길거리에 털썩 앉아버릴까? 어두운 밤에 파란빛 가로등이 있는 거리면 좋겠다. 일본에는 가로등 불빛이 파란색인 현(県)이 있다고 들었거든. 나는 일어를 할 줄 모르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게 뭐라고 말을 건다면 ‘칸코쿠 카라키마시따(나는 한국에서 왔어요)’라는 말만 반복할거야. 나는 파란 가로등이 빛나는 길거리에서 관절 인형을 품에 안고 원인불명으로 죽을거고, 그렇게 할거야.


『자기만의 방』을 쓴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해. 『자기만의 방』은 정말 아름다운 책이잖아. 그런 책을 쓴 총명했던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코트 속에 돌을 가득 집어넣고 천천히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대. 그날의 날씨와 강물의 온도를 상상해. 그리고 나는 어떤 강이 좋을까, 생각해. ‘센과 치히로’의 센은 어릴 적 물에 빠졌을 때 강의 신이었던 하쿠가 구해줬잖아. 나는 누가 함부로 나를 구해주지 않으면 좋겠어. 하물며 그게 강의 신이라고 하더라도. 떠오르지 말라고 코트 속에 돌까지 집어넣었는데 말이야. 일단은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어둑어둑한 시간에 숲 속으로 깊이 들어 가는거야. 그리고 조용한 강가에 앉아서 돌을 하나씩 주머니 속에 넣는거지. 돌을 넣으면서 소원을 빌어볼까? 하나, 떠오르지 않게 해주세요. 둘, 사인(死因)은 익사말고 원인불명으로 해주세요. 셋, 시체는 바다로 흘러가게 해주세요. 넷, 시체가 바다로 안전히 흘러들어갈 때까지 발견이 안되게 해주세요. 물살이 밥이 되어도 좋아요. 다섯,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게 해주세요. 여섯…일곱…여덟…아홉…열.

대부분의 강은 아마 더럽겠지? 그래도 눈을 뜬 채로 있고 싶어. 지나가는 물살이도 보고싶고, 강물 바닥에 놓인 돌도 보고싶어. 물 속을 흘러 다니는 더러운 조각들도 다 보고싶어. 그런 것들을 보다보면 혹시나 살고 싶은 마음이 들까? 그럴지도 몰라. 그래도 나는 강물 바닥으로 가라 앉을거고 그럼 그제서야 눈을 감을거야. 눈을 감고 ‘호오포노포노’를 할 거야. 호오포노포노는 하와이 주술사들이 하는 정화의식인데, ‘Thank you, I love you, I’m sorry, Please forgive me’ 이 4가지 주문을 계속 반복해서 외우는 거야. 자기 스스로에게 그 말을 해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친구, 가족, 주변 사람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이 세상의 존재들에게까지 그 영역을 넓혀나가는 거지. 우선은 내게 말해줄거야. ‘고마웠어. 사랑했어. 미안해. 용서해줘.’ 그리고 친구와 가족들에게 ‘고마워. 사랑해. 미안해. 용서해줘.’ 내 주변을 지나쳐 갔던 사람들 모두에게 ‘고마워요. 사랑해요. 미안해요.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이 강물에서 나를 지나쳐 가고 있는 존재들에게도, 죽고나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 만나게 될 존재들에게도. 그렇게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정화하다가 갈거야. 나는 아무도 오지 않는 어두운 숲 속의 강물 바닥에서 호오포노포노를 하다가 죽을거고 바다로 흘러 들어갈거야, 그렇게 할거야.


그런 상상을 하다가 눈을 떠. 그러고 다시 천장의 무늬와 벽지의 이음새, 조명의 조악한 부품을 차례대로 훑어봐. 삶은 여전히 여기에 머물러 있고 나는 잠시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다가 돌아왔는데, 그 사이에 다행히도 해가 졌어. 해가 졌기 때문에 천장도 벽지도 조명도 모두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아. 이제는 잘 시간이야. 자기 전에는 꼭 내일 눈을 뜨지 않기를 빌며 잠에 들어. 어쩔 수 없이 내일 또 눈을 뜨게 된다면, 내일은 침대에서 일어나볼까 생각해. 일어난 김에 샤워도 해볼 수 있겠지. 샤워를 하고 나서는 먼지로 더러운 방바닥도 깨끗히 치워보면 어떨까. 청소하는 김에 눅눅해진 이불도 빨아서 볕에 말리고. 이불이 마르는 동안 밖에 나가서 조금 걸어볼 수도 있으려나. 계속 못 읽었던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책 속에서 상상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을 수집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다시 침대에 묶여 천장의 무늬를 봐야만 할 때에도 조금 덜 심심할 것 같아. 나는 상상 속에서 매번 이상한 죽음을 맞이하고 그렇게 죽어서 아직까지 살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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