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문명론 75편 - 문명은 어떻게 조용히 무너지는가

조용한 것만이 끝내 남는다

by 사유의 무지랭이

* 문명은 어떻게 조용히 무너지는가

<조용한 것만이 끝내 남는다>


[붕괴는 소리 없이 시작된다.]


문명은 폭발로 무너지지 않는다.


붕괴는 언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조용한 지점에서 시작된다.


의미가 느슨해지고,

리듬이 흐트러지며,

지속을 붙잡던 결이 보이지 않게 풀릴 때

문명은 이미 내부에서 멈춘다.


쉼의 자리를 잃은 문명은 겉은 유지되지만

안에서 먼저 숨이 멎는다.


[관계의 과열]


많은 붕괴는 단절이 아니라

과도한 연결에서 시작된다.


강한 연결은 빠른 소모를 만든다.

붙잡음이 클수록 기대는 커지고,

기대가 커질수록 무너짐도 깊어진다.


과열은 관계를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서로를 소비한다.


문명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더 연결하려 하고,

더 말하고,

더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소모는 회복을 만들지 않는다.


[무관계의 자리]


오래 남는 것은 관계가 아니라

무관계다.


붙잡음이 없으므로 소모도 없고,

기대가 없으므로 무너짐도 없다.


그곳에는 설명도 없고, 증명도 없고,

역할도 없다.


대신 하나가 있다.


자유.


그 고요 속에서만 비로소 숨이 깊어진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움직이지만

존재는 무관계 속에서 쉰다.


문명이 사라지는 이유는 쉼의 자리를 잃기 때문이다.


[낮은 숨 — 바순]


문명은 종종 높은음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크게 울리고,

빠르게 반응하고,

강하게 드러나려 한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에서 구조를 끝까지 붙드는 것은

높은음이 아니다.


낮게 깔린 숨이다.


바순은 화려하지 않다.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

그러나 화음을 받치고, 리듬을 붙들며,

전체가 무너지지 않게 지탱한다.


낮은 숨이 사라질 때 음악은 겉은 남아 있어도

바닥이 꺼진다.


문명도 이와 같다.


[완벽과 흔적]


기계는 완벽을 만든다.

그러나 완벽은 복제된다.


버틴 시간은 복제되지 않는다.


손의 흔들림은 결함이 아니라

시간의 흔적이다.


무질서의 질서.

무기교의 기교.

무정성의 정성.


문명은 완벽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흔적으로 유지된다.


[조용한 것만이 끝내 남는다.]


붕괴 이후에 남는 것은 시끄러웠던 쪽이 아니라

조용했던 쪽이다.


높이 울린 것은 사라지고 낮게 깔린 숨은 남는다.


그래서


조용한 것만이 끝내 남는다.

시간을 통과하는 지점에 조용히 끝내 남게 된다.



[부연]


<사유 문명과 철학>


*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사유의 부재가 문명을 파괴한다.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W.F. Hegel)

문명은 사유의 외적 실현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계산적 사유에서 본질적 사유로 간다.


* 사유가 곧 문명의 실체이자 운명이라는 관점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하는 철학자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일 것이다.


아렌트는 현대 문명의 비극이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기를 멈춘 '사유의 불능'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사유문명론 1편 - 사유가 멈춘 곳에서 문명이 시작된다는 문제의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녀에게 문명이란 단순히 쌓아 올린 건물이 아니라, 깨어 있는 개인들이 비판적 사유를 통해 서로 연결되고 공적 영역을 지켜낼 때만 유지되는 위태롭고도 고귀한 상태라고 말한다.


<시 한 편>


정상지자태산(登上至自泰山)


그대 어제 태산에 올랐다지,

어느 봉우리가 가장 높던가?


장인석은 과연 있었는가,

대부송은 얼마나 우뚝하던가?


바다 위 낮은 해에 새가 날고,

바위에 번개 치니 용이 꿈틀거린다.


누가 천하가 작다 말하는가,

왕의 밖 또한 또 하나의 봉토다.


그대 음악이 쉬면 안 되지 않은가.


* 마누엘 데 파야

발레 음악 <사랑은 마술사>


3번 - 괴로운 사랑의 노래(Song of Love’s Sorrow)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겠네.


이 저주받은 집시 사내가 사라져 버린 뒤로는.


내 마음은 어둠 속에 갇혔고

눈은 그를 찾아 헤매고 있네.


그가 떠난 뒤 기쁨도 함께 사라졌네.


나는 웃지도 못하고 노래도 부르지 못하네.


그의 그림자만이 내 곁을 맴돌 뿐이네.


주무시기 전에 3번 들어 보시길.




작가의 이전글사유문명론 74편 - 지속의 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