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느린 것이 결국 모든 것을 지배한다
* 느림의 강한 힘
<가장 느린 것이 결국 모든 것을 지배한다>
[속도의 시대 이후에 남는 질문]
지금 시대는 끝없이 관계를 만든다.
이름을 알고,
반응을 주고받고,
보이지 않는 연결선으로
서로를 묶어 둔다.
인스타그램도, 페이스북도, 유튜브도
모두 관계를 확장하는 장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은 점점 더 지쳐 간다.
계속 보여야 하고
계속 응답해야 하며
계속 존재를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관계가 아니라
지속적인 노출 상태에 가깝다.
이 노출은 일종의 강한 노동에 서있는 것이다.
한번 발을 내리면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본인의
몸을 맡긴 상태를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유지하게 된다.
[무관계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평온]
그래서 사람은 조용히 벗어날 자리를 찾기 시작한다.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붙잡지 않으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거리를 찾는다.
그 거리를 우리는 무관계라 부른다.
무관계는 차가움이 아니다.
고립도 아니다.
불필요한 얽힘이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숨이 고르게 이어지는 상태다.
기대가 없으므로
실망도 없고,
붙잡지 않으므로
떠남도 상처가 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남는 것은 설명되지 않는 조용한 평온이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존재는 무관계 속에서 쉬어 간다.
무관계는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관계의 최소 선이다.
[가장 느린 신호]
19세기,
새뮤얼 모스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신호 체계를 만들었다.
점과 선.
단 두 개의 요소만으로
대륙을 넘어 메시지를 보냈다.
전선 위를 흐르던 것은
속도가 아니라
간격이었다.
짧음과 길음 사이의 침묵.
그 침묵이 의미를 만들었다.
모스부호는
빠르게 말하지 않는다.
점.
잠시 멈춤.
선.
다시 멈춤.
의미는 그 멈춤 사이에서 읽힌다.
문명은
가장 빠른 언어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가장 단순한 신호로 확장되었다.
[느림이 강한 힘이 되는 이유]
빠름은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스스로를 소모한다.
느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을 점유한다.
모스부호는 화려하지 않다.
이미지도 없다.
음성도 없다.
그러나 지금도
바다 위에서,
군 통신에서,
극한 상황에서 사용된다.
이유는 단 하나다.
가장 단순한 것은 가장 오래 남기 때문이다.
사유도 그렇다.
설명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며
남는 구조로 지속된다.
그래서
가장 느린 것이
결국 늘 남는다.
[느림 이후에 다시 시작되는 사유]
그 조용한 자리에서 사유는 다시 시작된다.
속도를 잃은 뒤가 아니라
속도를 내려놓은 자리에서,
관계를 버린 뒤가 아니라
본질만 남긴 자리에서,
점과 선 사이의 침묵처럼
문명은 조용히 다시 움직인다.
빠름은 반응을 남기고 느림은 구조를 남긴다.
그리고
구조만이 시간을 통과한다.
[왜 느림은 권력이 되는가]
권력은 소리를 크게 내는 것이 아니다.
권력은 지속을 장악하는 것이다.
빠름은 순간을 장악하지만 느림은 시간을 점유한다.
속도는 반응을 지배한다.
그러나 반응은 휘발된다.
반면 느림은
결정을 지배한다.
이 결정이 지배가 진정한 권력이 된다.
사람은 빠르게 반응할 때 소비자가 되지만
느리게 사유할 때 선택자가 된다.
선택하는 자가 결국 구조를 만든다.
구조를 만드는 자가 또한 권력을 갖게 된다.
모스부호가 살아남은 이유도 이와 같다.
더 빠른 통신 기술이 등장했지만
극한 상황에서는
가장 단순하고 느린 방식이 선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림이 결국 모든 것을 지배한다.
* 행원 <두보>
밤이 오고 가랑비가 내려 꽃다울에 먼지를 씻어내고,
귀공자가 높은 마루에 비치고 발걸음은 가깝고 고르게 이어지네.
살구꽃 동산이 야위고 초췌해져 간다고 이상히 여기지 마소.
온성에 어사화 꽂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밤이라면.
밤의 노래(Nocturne)의 아버지
존 필드의
Nocturne No.5 in B Major (H.37)
주무시기 전에 들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