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문명론 93편 - 남는 것의 질서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을 가르는 기준

by 사유의 무지랭이

* 남는 것의 질서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을 가르는 기준>


[소음과 구조]


확산은 소음을 만든다.

침묵은 구조를 만든다.


빠르게 퍼지는 것은

빠르게 사라진다.


소음은 크지만 흔적이 없고

구조는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다.


남는 것은 조용하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조용히 남아 있던 것이

비로소 드러난다.


[잔존의 밀도]


남는 것은

한 번의 충격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을 견디고,

비난을 견디고,

오해를 견디고,

침묵을 견딘다.


그 견딤의 층이 쌓일수록

밀도는 높아진다.


밀도가 높은 것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화려하게 등장한 것들이 사라진 뒤에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그것이 잔존의 밀도다.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


사라지는 것은 표면에 있다.

남는 것은 깊은 곳에 있다.


표면은 교체된다.

깊은 곳은 계승된다.


유행은 표면을 바꾸지만

구조는 바꾸지 못한다.


기술은 표면을 바꾸지만

존재를 바꾸지 못한다.


그래서 표면이 아무리 바뀌어도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것은

조용히 살아남는다.


[문명의 척도]


문명의 수준은

확산 속도로 측정되지 않는다.


얼마나 빠르게 퍼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남았는가로 측정된다.


확산 속도가 아니라

잔존 밀도가

문명을 결정한다.


빠르게 퍼진 것은

빠르게 잊히고,

오래 남은 것은

문명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문명은

가장 빠른 것이 남는 게 아니라

가장 오래 지키고 남은 것들로

이루어진다.


[부연]


조선은 기록의 나라였다.


사건을 기록하고

정치를 기록하고

시간을 집요하게 기록했다.


그 기록의 밀도는

어떤 문명도 흉내 내지 못 할 정도였다.

그 보관도 철두철미 했다.


기술은 늦게 들어왔다.

그러나 기술의 토양은 이미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의 식민지는 기술의 차이가 만들었다.

그러나 사유의 깊이의 차이가 만든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낙후한 것이 아니었다.

기술만 늦게 받아들였을 뿐.

사유의 토양은 이미 선진국이었다.


그 후에 늦게 기술이 들어오자

기록의 문화가 만들어 놓은 뿌리가

빠르게 자라났다.


지금 미국은 최선진국이며

디지털의 왕국이다.

세상의 속도를 압도하고 있다.


그런 미국이

대통령의 메모와 서명된 문서.

국가의 중요한 종이 문서기록들을

디지털의 시대,

로봇의 시대에도

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장치로 철저히 보존한다.

제국의 기록을 최후의 물성으로 금과 같이 다룬다.


제국은 늘 마지막까지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그것이 유지본능이다.

기록을 남기는 것은

시간을 통과한 제국을 유지시켜 준다.


그러나 문명은

제국의 본능 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토양의 깊은 곳에서

붙잡힌 시간 위에서

사유가 자라듯이


사유 위에서

문명은 다시 긴 숨을 내딛는다.


- 경건하게 가봅니다-

*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

<노트르담 미사(Messe de Nostre D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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