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의 결이 지탱하는 힘
우리의 사고가 한 획의 점이라면 사유는 그 점들의 연결로 만들어지는 좀 더 논리적, 철학적 결론이다.
그래서, 이장에서 우리는 사유의 측면에서 논리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사례를 들어 살펴볼 것이다.
그 이유는 사유가 설명하기에 논리적으로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사유는 너무 분명하게 내적으로 인정하고 인식할 수 있는 범주에 있기 때문이다.
[글래디에이터가 된 인격의 결]
글래디에이터의 출발점
한때 그는 장군이었다.
명령하면 따르는 병사들이 있었고,
그의 이름 앞에는 직위와 권력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보기에는 그 권위는 너무 자연스럽고 그에게는 딱 맞는 옷과 같았다.
그의 말은 설명이 아니라 지시였고,
그의 침묵조차 의미를 가졌다.
그는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그 위치는 사람들을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위치에 서 있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은 예측할 수 없이
그 위치를 영원히 허락하지 않는다.
즉, 권위도 본인이 원하지 않는 시점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을 잃는다.
지위는 박탈되고,
이름은 지워지며,
모든 명예는 땅바닥에 내려치며,
그는 검투사로 끌려 내려온다.
그 순간,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인간적 설명은 사라진다.
그를 장군으로 보이게 하던
환경과 장치와 언어가
한꺼번에 무너 저 내렸다.
그는 그를 둘러쌓고 있던 모든 장벽이 이젠 무너져 내리고 자기 자신 만이 그 모든 것을 지탱하게 된다.
[환경이 무너질 때 남는 것은 무엇인가]
환경은
사람을 지탱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을 대신 설명해 주는 장치에 가깝다.
직함이 말해 주고,
성과가 증명해 주며,
관계가 그를 보증하며,
권위가 그를 위치에 매달아 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사라질 때
비로소 한 가지 질문만 남는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간이었는가.
도대체 본질적 내면은 어떠한 모습이었는가.
장군일 때와
검투사일 때
그는 다른 옷을 입었지만
다른 인간이 되지는 않았다.
명령하는 자에서
명령받는 자로 떨어졌지만
그가 자신을 대하는 기준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가진 인격의 결(품격이라고 해도 된다)이그의 말과 행동 심지어 그의 숨 쉬는 호흡에서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그의 인격의 결은 더욱 단단해진다.
아니 인격의 결은 그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빛나게 된다.
[인격의 결은 언제고 드러나고 만다.]
인격의 결은
성공할 때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성공할 때는
인격의 결이 보이지 않는다.
박수와 승인과 결과가
사람을 대신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인격의 결은
설명할 것이 사라졌을 때,
붙잡을 환경이 사라졌을 때,
도망칠 언어가 남아 있지 않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그래서 인격의 결은
훈련의 산물이 아니라
사유의 축적이다.
그래서, 사유는 마지막까지 인격의 결을 유지하게 해주는 방패가 된다.
[마지막까지 사유는 왜 설명을 거부하는가]
사유는
설명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설명은
이미 합의된 언어 안에서만
작동한다.
그러나 사유는
그 합의 이전에서 시작된다.
설명은
“이해시켜야 한다”는
타인의 기준을 전제하지만,
사유는
“견뎌야 한다”는
자기 내부의 압력을 전제한다.
그래서 사유는
설명될수록 약해지고,
설명될수록 오해받는다.
설명될수록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설명은 사람을 멈추게 한다
설명은
안심을 준다.
“아, 그렇구나.”
이 문장은
생각을 끝내는 문장이다.
이해했다는 감각은
사람을 정지시킨다.
반면 사유는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 상태를
사람 안에 남겨 둔다.
그 불편함,
그 애매함,
그 정리되지 않은 감각 속에서
사람은 스스로를 다시 만들기 시작한다.
[사유는 불안을 견디는 능력이다]
사유는
재능이 아니다.
사유는
불안을 견디는 능력이다.
설명 없이
자신의 선택을 감당하고,
확신 없이
하루를 통과하고,
보증 없이
자기 방향을 유지하는 힘이다.
이 힘이 쌓일 때
사람 안에는
인격의 결이 생긴다.
인격의 결은 설명하지 않는다
인격의 결로 살아온 사람은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로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이미
살아온 방식이
그 사람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래디에이터는
자신을 해명하지 않았다.
단지, 보인 모습이 전부가 된다.
[다시, 글래디에이터의 진실]
글래디에이터의 힘은
검을 쥔 팔에 있지 않았다.
그의 힘은
환경이 바뀌어도
자신의 중심을 바꾸지 않는 데 있었다.
그 일관성,
그 설명 없는 태도,
그 흔들리지 않는 방향.
그것이
사유가 만든 인격의 결이며,
몰락 속에서도
사람을 남게 만드는 힘이다.
그래서, 끝까지 그를 지켜주고 인격의 결을 유지해 준 것은 장군이라는 칭함이나 갑옷에서 오는 인위적 권위가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유지되고 견뎌온 사유의 힘이 작동하기에 그는 끝까지 품위와 격을 잃지 않았기에 그를 지탱하는 권력은 그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외피에 불과했던 것이다. 외피를 벗었을 때 사유로 단련된 인격의 결은 영원한 지위를 갖게 해 준다.
이제 <사유문명론 4편에서는 ”사유로 형성된 존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를 다룰 것이다.>
사유문명론 / 철학 에세이 / 사유와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