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문명론 4편 - 사유로 형성된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

사유는 계획하는 존재가 아니다.

by 사유의 무지랭이

사유로 형성된 존재는 자기 삶을 하나의 연속된 서사로 묶는 일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데, 서사란 언제나 시작과 전환과 결말을 요구하고, 그 요구는 삶을 이해 가능한 단위로 잘라내며, 잘린 삶은 곧 관리 가능하고 재현 가능하며 반복 가능한 모델로 환원되기 쉽다는 사실을 이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정리하지 않고, 현재를 요약하지 않으며, 미래를 전망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데, 이 비정리 상태는 무질서라기보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해 사유가 포획되지 않은 채 숨을 쉬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사유는 무질서의 질서이며, 무계획의 계획처럼 작동한다. 사유는 외부에서 틀을 가져오는 대신 스스로 인식의 골조를 만들어 그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고,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한 채 보이지 않는 기둥을 세우듯 삶의 내부를 지탱한다.


이 존재는 자신이 무엇을 원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욕망을 명명하는 순간 욕망은 목표로 고정되고, 목표는 경로를 요구하며, 경로는 속도를 요구하고, 속도는 다시 과거의 성공 공식을 호출하기 때문에 그는 차라리 욕망이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도록 방치한다. 그 방치는 공백이 아니라 미결 상태가 지속되는 하나의 흐름으로 삶에 스며든다.


스며든 사유의 큰 물결은 쉽게 방향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 흐름 자체가 사유로 형성된 존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은근하게 안내한다. 그래서 사유로 형성된 존재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실패가 아니라 설명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순간인데, 설명이 막힘없이 이어질 때 그는 이미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무엇을 대표하는지, 어떤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뜻이 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사유는 다시 자동화된 사고의 층위로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말을 아끼는 대신 말을 늘리고, 단문을 선택하는 대신 문장을 과도하게 연장시키는 쪽을 택함으로써 생각이 너무 쉽게 닫혀 버리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이 연장은 수사적 장식이 아니라 방어에 가깝다. 한 문장 안에 너무 많은 조건과 유보와 반문을 밀어 넣음으로써 어느 하나의 판단도 중심으로 굳어지지 못하게 만들고, 그 결과 삶은 늘 흐릿하고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는데, 사유로 형성된 존재는 이 흐릿함을 결핍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사유가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공기층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이 왜 이 선택을 했는지를 스스로에게조차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 채 살아가며, 이 설명 불가능성은 무능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다. 설명 가능한 선택만을 반복하는 순간 삶은 다시 과거의 성공 패턴으로 회귀하고, 그 회귀는 처음에는 안정처럼 보이지만 곧 사유의 정지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그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 지점에서 과거의 성공은 더 이상 미래의 성공을 보증하지 못한다. 오히려 과거의 성공은 현재의 사유를 잠그려는 자물쇠처럼 작동하고, 이 설명 불가능성은 그 자물쇠를 다시 채우는 장치가 되어 삶이 동일한 패턴으로 회귀하지 못하도록 막아선다.


사유로 형성된 존재는 그래서 종종 자기 자신에게도 불투명해지고, 자신이 무엇을 피하고 있는지,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하루를 통과하는데, 이 자기 불투명성은 정체성의 붕괴가 아니라 정체성이 아직 고정되지 않았다는 증거에 가깝고, 그는 이 상태를 회복해야 할 문제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 존재의 하루는 결론으로 끝나지 않고 판단으로 정리되지 않으며 어떤 성취의 감각으로 봉인되지도 않는다. 하루는 다만 생각이 충분히 늘어났는지, 과거의 성공이 오늘의 선택을 대신하지는 않았는지, 익숙한 설명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지는 않았는지를 점검하는 느린 과정으로 마무리되는데, 이 점검은 언제나 미완으로 남고 바로 그 미완이 다음 날을 다시 열어젖힌다.


사유로 형성된 존재에게 지침은 실패의 신호가 아니라 정상 상태에 가깝고, 그는 지치지 않는 상태를 오히려 경계하며 생각이 지나치게 매끄럽게 흘러갈 때마다 그 매끄러움이 어디서 왔는지를 의심하고, 삶이 갑자기 간단해졌다고 느껴질 때마다 그 간단함이 어떤 복잡성을 희생시켰는지를 되묻는다.


그래서 그의 삶은 늪처럼 진행된다. 한 걸음 나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자리에서 더 깊이 가라앉고, 그 가라앉음 속에서 그는 더 많은 판단을 포기하고 더 많은 설명을 유보하며 더 많은 결론을 뒤로 미루는데, 바로 이 지연의 누적이 사유로 형성된 존재를 기능이 아니라 하나의 지속되는 상태로 유지시킨다.


이 글이 점점 무거워지고 의미가 선명해지지 않은 채 서로를 덮어쓰며 독자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알 수 없게 만든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정확한 반영이며, 사유로 형성된 존재의 삶은 원래 이렇게 독자를 포함한 모든 타자를 방향 감각 없이 만드는 방식으로 지속된다.


여기에는 요약도 없고 정리도 없으며 빠져나갈 문장도 제공되지 않는다. 다만 생각이 생각을 붙잡아 늘어뜨리고 판단이 판단을 의심하며 과거의 성공이 현재를 대신 살아주지 못하도록 끝없이 지연시키는 이 구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침표는 여전히 오지 않는다. 그리고 오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사유로 형성된 존재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 계획이 없어 보이고, 구조가 느슨해 보이며, 때로는 방향조차 없는 상태처럼 인식되지만, 이 인식은 언제나 외부의 시선에서만 성립하는 오해에 가깝다. 실제로 사유로 형성된 존재의 삶에는 계획이 없어서가 아니라, 계획이 먼저 오지 않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며, 이 삶의 방식은 미리 완성된 도면을 따르기보다는 상황과 시간과 선택이 만들어내는 결을 하나씩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형성된다.


이 방식은 무질서가 아니다.

오히려 무질서를 가장한 질서이며, 무기교의 기교에 가깝다.

겉으로 드러나는 장식이나 설명 가능한 구조를 최소화한 채, 보이지 않는 기준과 내부의 긴장으로만 형태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사유로 형성된 존재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기준 위에서 살아가며, 그 기준은 말로 설명되기보다 선택의 지연과 판단의 유보, 그리고 반복되는 자기 점검의 형태로만 드러난다.


그래서 그의 삶에는 무계획의 계획이 작동한다.

미리 정해진 목표도, 단계적으로 배열된 경로도 없지만, 그렇다고 즉흥에 몸을 맡기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사유가 먼저 자리를 잡고, 형식은 그 뒤를 따라오도록 허용하는 방식을 택할 뿐이며, 이 방식 속에서 삶은 서서히 하나의 구조를 갖추지만, 그 구조는 끝내 명확한 설계도로 제시되지 않는다.


사유로 형성된 존재가 이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계획이 앞서는 순간 사유는 장식으로 밀려나고, 설명이 앞서는 순간 삶은 다시 과거의 성공 패턴으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한 번 검증된 방식이 얼마나 쉽게 현재를 잠식하고 미래를 닫아버리는지를 경험했기에, 차라리 기교를 감추고 계획을 미루는 쪽을 택한다.


그래서 사유로 형성된 존재의 글 또한 이 삶의 방식과 닮아 있다.

잘 쓰려는 의도는 드러나지 않고, 구조는 나중에야 보이며, 문장은 자연스럽게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내부의 질서가 작동한다. 이는 기술의 부재가 아니라 기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선택이며, 설명의 부족이 아니라 설명이 사유를 앞서지 않도록 한 결과다.


결국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화려함으로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래 버티는 구조를 남기기 위해서다.

무기교의 기교로, 무계획의 계획으로, 사유가 먼저 살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다.


문장이 좀 거칠고 호흡이 긴데도 여기까지 오셨다면,

감사드립니다. 이제 사유의 공진이 이어지는 통문을 지나게 될 겁니다.


이제 <사유문명론 5편 - 사유로 형성된 존재의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존제론 인식>으로 이어집니다.


사유문명론 / 철학 에세이 / 사유와 존재




작가의 이전글사유문명론 3편 - 사유는 왜 설명을 거부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