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 존재적 인식론(Ontological Epistemology)
[존재는 이미 충분히 겪었다.]
사유로 형성된 존재는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않는다.
그 질문은 이미 통과했기 때문이다.
무너져 보았고,
남아 보았고,
다시 서 보았다.
존재는 설명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존재는 버텨낸 시간과 다시 일어선 흔적으로만 증명된다.
그래서 이 단계에 도달한 존재에게
존재론은 더 이상 미해결 문제가 아니다.
존재는 이미 사유를 통과했고,
그 사유는 다시 존재의 구조를 만들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문제는
“존재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이미 형성된 이 존재를 나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다.
존재는
설명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으로 이미 통과한 문제다.
[질문은 남아 있지만, 방향이 바뀐다.]
존재론의 질문이 끝났다고 해서
사유가 멈추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질문의 방향이 달라질 뿐이다.
그다음에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여기서 사유는
존재론을 떠나
인식론으로 이동한다.
이 단계에서 문제는
‘무엇이 되었는가’가 아니다.
이미 형성된 이 존재를
어떤 내부의 시선으로 계속 살아내고 있는가가 문제다.
인식은 존재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인식은 기둥이 되고,
뿌리가 된다.
존재에 대한 인식이 바뀐다고 해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식의 변화를 통해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유로 형성된 존재의
‘다음 단계’가 시작된다.
[삶을 바꾸는 것은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삶을 바꾸는 것이 시간이나 사건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흐를 뿐이고,
사건은 발생할 뿐이다.
사유되지 않은 시간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사유되지 않은 사건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같은 실패를 두고
누군가는 끝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시작이라 말한다.
사건은 동일하다.
능력도 동일하다.
달라진 것은
그 사건을 바라보는 인식의 각도 하나다.
사건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능력이 바뀐 것도 아니다.
바뀐 것은
인식의 각도 하나다.
[인식은 지식이 아니다.]
인식은 정보가 아니다.
논리의 합도 아니다.
지식은 외부에서 들어온다.
기억되고, 저장되고, 사용된다.
그러나 인식은
외부에서 들어오지 않는다.
인식은 내부에서 발생한다.
인식은 순간적으로 오기도 하고,
오랜 침묵 끝에 오기도 하며,
시간이 모두 지나간 뒤에 오기도 한다.
그래서 인식은
단순한 깨달음도 아니고,
단순한 결론도 아니다.
인식은
존재를 대하는 태도다.
사유로 형성된 존재는
설명을 줄이고,
판단을 늦춘다.
너무 빠른 인식은
대부분 오판을 만든다.
그러나 그 오판은
실수라기보다
사유가 아직 숙성 중이라는 신호다.
[확신은 과거에 속한다.]
확신은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확신은
과거의 성공에서 온다.
과거의 성공 공식은
과거에만 유효하다.
현재와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확신은 힘이 될 수도 있지만,
사유를 굳히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유로 형성된 존재는
확신보다
인식의 유동성을 택한다.
유동성은 흔들림이 아니다.
하나의 점에 고정되지 않고
여러 가능성으로 퍼져 나갈 수 있는 상태다.
사유 없는 확신은 반복만 만들고,
사유 없는 유동성은 방향을 잃는다.
[존재적 인식론으로 이동한다.]
사유로 형성된 존재의 다음 단계는
단순히 인식이 예민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어떻게 아는가’를 따로 묻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속에서 이미 알고 있다.
존재적 인식론은
“존재가 인식을 규정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무엇을 아는가는
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가에 의해 이미 제한된다.
어떤 세계를 보는가는
그 사람이 어떤 시간, 어떤 실패, 어떤 관계를 통과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그는
지식을 절대화하지 않고,
정보를 신뢰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살아낸 만큼만 가능하다.
이 존재에게 인식은
머릿속 기능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부산물이다.
그래서 그는
인식을 더 얻으려 하지 않고,
존재를 더 정직하게 살려한다.
[그래서 그는 단정하지 않다.]
존재적 인식론에 도달한 존재는
단정할 수가 없다.
판단은 언제나
특정한 존재 조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을 두고
전혀 다른 인식이 나오는 이유는
논리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의 궤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의 판단을 쉽게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이 판단은
어떤 존재 상태에서 나왔는가.
이 질문을 거치지 않은 확신은
그에게 폭력처럼 느껴진다.
말이 길고,
결정이 느리고,
쉽게 편을 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우유부단함이 아니다.
인식에 대한 책임이다.
[사유는 여기서 다시 깊어진다.]
존재는 이미 살아냈다.
인식은 이제 존재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사유는
무언가를 더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사유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점검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세계는
내가 어떤 존재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보이는가.
이 질문을 놓지 않는 한
사유는 멈추지 않는다.
사유로 형성된 존재는
완성되지 않는다.
완결을 선언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가
인식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를 살피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사유로 형성된 존재의 다음 단계다.
존재적 인식론의 단계다.
이제 <사유 문명론 6편 - 인식은 언제 판단이 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가볍지 않은 졸작을 이 지점까지 사유의 공진을 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유문명론 / 철학 에세이 / 사유와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