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문명론 99편 - 유행을 통과한 사유

시간을 통과한 것들만이 남는 이유

by 사유의 무지랭이

* 유행을 통과한 사유

<시간을 통과한 것들만이 남는 이유>


[유행의 본질]


유행은 빠르게 확산된다.

많은 사람이 동시에 보고,

동시에 말하고,

동시에 소비한다.


그래서 유행은 거대한 힘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행의 본질은

지속이 아니라 확산이다.


유행은 깊이로 퍼지는 것이 아니라

표면 위로 번진다.


빠르게 퍼지지만 빠르게 식는다.


그래서 유행은 시대를 채우지만

시간을 통과하지는 못한다.


[시간의 시험]


시간은 모든 것을 시험한다.

어떤 것은 잠깐 빛나고 사라지고,

어떤 것은 조용히 남는다.


시간을 통과한 것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것들은

유행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필요와 본질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필요에서 태어난 것은

사용 속에서 단단해지고,


본질에서 나온 것은

시간 속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남는 것들의 특징]


시간을 통과한 것들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을 때가 많다.


단순하고,

묵직하고,

조용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오래 사용할 수 있는 구조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유행은 새로움을 소비하지만,

본질은 시간을 견딘다.


[사유와 시간]


사유는 유행을 따라가지 않는다.

사유는 시간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지금 인기 있는가가 아니라,

오래 남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사유는 항상 느리고 조용하다.


그러나

결국

문명 속에 남는 것은

유행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한 생각들이다.


[사유의 건반]


베토벤 시대의 피아노 건반은

흰건반 자리가 검은색이었고

검은건반 자리가 흰색이었다.

현대의 건반과 정반대의 위치였다고 한다.


그러나

건반의 색이 바뀐다 해도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지금 피아노에 앉아 보면

흰건반이 넓게 펼쳐져 있고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어

마치 중심처럼 보인다.


검은건반은 그 사이에 끼어 있어서

작고, 간격처럼 보이고, 보조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음악은 흰건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검은건반이 들어오는 순간

음은 깊이를 얻고 선율은 방향을 얻는다.


건반의 색이 바뀐다고

음의 본질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건반의 배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음악은

흰건반의 위치에서 나오지 않고

검은건반의 위치에서 나오지도 않는다.


음악은

그 건반 위에서 만들어지는

리듬과 질서에서 나온다.


문명도

색의 변화에 의해 완성되지 않는다.


사유는 색을 따르지 않는다.


사유는 배열이 아니라

리듬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길을 만드는 것]


길도 마찬가지다.


버스가 없던 시대에도 길은 있었다.

길은 이동 수단이 만든 것이 아니라

걷는 자의 반복이 만든 것이다.


속도는 길을 소비한다.

빠르게 통과하고 빠르게 지나간다.


그러나 리듬은 길을 만든다.

같은 곳을 다시 걷고 또 걷는 동안

흙은 눌리고, 방향은 남고, 길이 생긴다.


길은 반복이 남긴 것이다.

배열이 아니라 리듬이 남긴 것이다.


[사유의 리듬]


사유는 빠르게 달리는 기술이 아니다.

느리게 걷는 감각이다.


전면에 놓이지 않은 건반에서도

같은 음을 찾아내는 느린 손에 있다.


문명이 무엇을 중심에 두든

사유는 빠름을 따르지 않는다.


사유는

배열이 아니라

리듬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연]


인간의 대뇌피질은

하나의 웨이퍼와 같다.


반도체가

순수한 실리콘 위에서 시작되듯

사유도

비어 있는 인간의 피질 위에서 시작된다.


그 위에

경험이 새겨지고

질문이 새겨지고

사유가 새겨진다.


웨이퍼 위에

미세한 회로를 그리듯

생각은

피질 위에

보이지 않는 무늬를 만든다.


이 공정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검투사가 매일 칼을 갈듯


사유하는 자는

매일 생각의 날을 벼린다.


그 벼림이

노광(Lithography)이다.


외부의 설계도가 아니라

스스로의 고뇌라는 빛으로

자신의 피질 위에

사유의 회로를 새기는 과정이다.


그러나 문명은

한 장의 웨이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없이 새겨진 사유의 웨이퍼들이

세대를 건너 층층이 쌓일 때


비로소

거대한 기억이 된다.


수백 년을 건너온

수많은 기록들은


인류가

대뇌피질 위에 새겨온

사유의 웨이퍼들을

겹겹이 쌓아 올린

문명의 기억 장치에 보관되어 전해젔다.


그래서 문명은

한 명의 천재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작은 사유들이

시간 속에서 층층이 쌓여

거대한 대역폭을 만들었다.


문명은 이런 생각의 반도체들이

떠 받친 결과물이다.



레게가 울린다.

* 패티 스미스 — Redondo Beach

<슬픈데 경쾌한 리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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