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 기준을 만드는 사유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사유의 끝]
사유의 목적은
지식을 늘리는 데 있지 않다.
더 많이 아는 것,
더 많은 정보를 모으는 것,
더 복잡한 설명을 만드는 것.
이 모든 것은
사유의 과정일 수는 있지만
사유의 목적은 아니다.
사유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모든 것을 붙잡을 수는 없고
모든 것을 따라갈 수도 없다.
그래서 사유는
세상을 더 많이 가지려는 기술이 아니라
남길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다.
[선택의 문제]
인생은
무언가를 계속 더 얻는 과정이 아니다.
인생은 오히려
점점 더 분명하게
무엇을 남길 것인지
무엇을 버릴 것인지
정리해 가는 과정이다.
젊을 때는 많이 모으려 한다.
경험도,
지식도,
사람도,
물건도.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삶은
획득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된다.
무엇을 곁에 둘 것인가.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
이 질문이
삶의 방향을 만든다.
[기준의 탄생]
그래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기준이다.
정보는 방향을 주지 않는다.
정보는 단지 많아질 뿐이다.
기준이 없는 사람은
늘 외부를 따라 움직인다.
유행이 바뀌면 방향이 바뀌고
소문이 바뀌면 판단이 바뀐다.
그러나 기준이 있는 사람은
속도에 끌려가지 않는다.
그는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정리한다.
그래서 기준은
지식보다 늦게 생기지만
지식보다 오래 남는다.
[남는 것]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이 사라진다.
유행도 사라지고
소문도 사라지고
순간의 성과도 사라진다.
그러나
자기 기준으로 살아간 삶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기준은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정렬하는 것이다.
삶은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조용히 남는다.
[기준을 만드는 사유의 과정]
받아 드는 사유 <카벨 Qabbel (קבל)>
사유는
처음부터 판단하지 않는다.
먼저 받아들인다.
히브리 전통에서는
이 첫 단계를 ‘카벨(קבל)’이라 부른다.
받아들임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복종이 아니다.
기준을 모으는 것이다.
기준은 비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먼저 충분히 받아들인 뒤
그다음에 버리는 것이 시작된다.
많은 문화에서
위대한 것 앞에서 취하는 태도는
숭배였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복종하는 방식.
그러나 사유의 태도는 숭배와 다르다.
사유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
사유는 조용히 받아 든다.
손에 들고
사용하고
시간 속에 놓는다.
사유적 존재는 물성을 숭배하지 않는다.
대신
마주하고
사용하고
곁에 둔다.
그것은 과시의 대상이 아니라
손에 받아 든 사유의 도구다.
문명은 무엇을 숭배하느냐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문명은 무엇을 받아 들고
어떻게 사용하느냐로 만들어진다.
존중은 큰 몸짓이 아니다.
손에 들고
조용히 사용하는 것.
이 작은 태도가 문명의 깊이를 만든다.
[우공이산 — 사유문명의 축적]
<열자(列子) 탕문편>
아흔 살 노인은
집 앞을 가로막은 두 개의 큰 산을
삽으로 조금씩 파내기 시작했다.
“늙은 몸으로 언제 이 산을 옮기겠는가.”라는 질문에
“내가 죽으면 아들이 있고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있다.
자손은 끊이지 않지만 산은 더 자라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노인이 믿은 것은
힘이 아니라 축적의 힘이었다.
하루의 삽질은 작다.
그러나 그 작은 반복이
세대를 건너 이어지면
산도 결국 움직인다.
산은 하루에 옮겨지지 않는다.
돌 하나씩 치우다 보면
어느 날 지형이 바뀐다.
수없이 반복된 질문,
사라지지 않고 남은 기록,
대를 건너 이어진 생각들이
시간 속에서 층을 만든다.
노인은 산을 옮긴 것이 아니라
지속을 시작한 것이다.
그 지속이
세대 위에 세대를 쌓고
시간 위에 시간을 쌓아
결국 산을 움직였다.
사유문명론에서 문명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작은 사유들의 축적이다.
오늘의 한 문장,
오늘의 한 기록,
오늘의 한 질문.
그것들이 쌓여
언젠가 문명의 지형을 바꾼다.
노인이 옮긴 것은 산이 아니라
<지속되는 축적의 힘>이었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맥베스 Op.23>
- 운명에 맡겨진 맥베스의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