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음의 잔여가 문명이 되는 방식
[문명은 시작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의 문제다.]
사유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는 순간, 그것은 사유가 아니라 정지가 된다.
인류 문명의 궤적을 설명하려는 시도들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설명은
문명이 어디서부터 달라졌는가에 집중해 왔다.
지리, 환경, 농업의 가능성, 가축화, 면역의 축적,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기술과 무기의 비대칭.
그 설명이 보여준 것은
문명이 같은 출발선에 서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회는 조건을 먼저 가졌고,
그 조건은 잉여를 만들었으며,
잉여는 총과 쇠를 낳았고,
균은 의도와 무관하게 정복의 속도를 앞당겼다.
이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문명의 출발이 평등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이 설명은
문명이 왜 시작되었는가까지만 말해준다.
문명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리고 왜 어떤 문명은 비어 버렸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사유문명론은
바로 이 침묵에서 출발한다.
문명은 조건으로 시작될 수는 있지만,
조건만으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발전한 문명과 깨어 있는 문명은 같은 길이 아니다.]
발전론에서 문명은
앞으로 나아간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빠르게 확장하고,
더 강하게 지배한 사회가
문명의 중심에 놓인다.
이 관점에서 문명은
속도의 문제이고,
효율의 문제이며,
축적의 문제다.
그래서 발전이 멈추면
문명은 곧 쇠퇴한다.
그러나 사유문명론은
전혀 다른 기준에서 문명을 본다.
사유문명에서 문명은
결과가 아니라 상태다.
얼마나 멀리 갔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깨어 있었는가가 기준이 된다.
총과 쇠는
사유의 깊이를 증명하지 않는다.
균에 대한 면역은
사유의 성숙을 대신하지 않는다.
환경의 우위는
문명의 가능성을 넓힐 수는 있어도,
문명의 방향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두 문명관은
끝내 화해하지 않는다.
발전론은 묻는다.
어떻게 더 앞서 갔는가.
사유문명론은 묻는다.
무엇을 끝까지 멈추지 않았는가.
이 차이는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문명을 바라보는 존재론의 단절이다.
[사유는 왜 멈추지 말아야 하는가.]
— 사유를 위한 멈춤과 사회 속 사유의 지속
사유문명론은
모든 멈춤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유를 위한 멈춤은 필요하다.
그 멈춤은 사고를 정지시키는 멈춤이 아니라,
사유를 더 깊게 만들기 위한
긴장된 정지다.
사유는 그 멈춤 속에서 죽지 않는다.
그러나 사유가 한 번 시작되었을 때,
그 사유를 인위적으로 중단시키는 멈춤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사유는 시작되는 순간
개인의 내부에 머물지 않는다.
사유는 곧 사회와 관계 맺고,
질서와 충돌하며,
규범에 균열을 만든다.
그래서 사회에 대해 멈춘 사유는
중립이 아니라 퇴장이다.
사유가 사회의 리듬을 찾는 과정을
중단하는 순간,
그 사회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교정할 수 없게 된다.
사유문명론이 말하는
‘사유는 멈추지 않는다’는 말은
끊임없이 말하라는 뜻이 아니다.
사유의 결에
자신을 맡기라는 요구다.
사유가 만들어내는 긴장,
불편함,
속도의 어긋남을
억지로 정리하지 말고,
그 리듬 속으로
스스로를 던지라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깨어 있음의 잔여들이 남는다.
완결되지 않은 질문,
정리되지 않은 판단,
사회 속에서 끝내 소화되지 않은 사유들.
이 잔여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쌓이고, 겹치고,
하나의 결을 만든다.
그 결이 개인의 태도가 되고,
태도가 반복되며
사회적 방향을 형성한다.
그 방향이 축적될 때,
문명은 비로소 형태를 얻는다.
문명은
총과 균과 쇠로 시작될 수는 있어도,
깨어 있음의 잔여 없이는
결코 유지되지 않는다.
사유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않았던 사유만이
사회를 살아 있게 했고,
문명을 비어 있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사유문명론 12편 - 멈추지 않는 사유는 왜 항상 불편한가 - 사회라는 이름의 압력>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