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를 통과한 사유는 어디로 향하는가
* 고요 이후 사유가 가야 할 방향 — 고요를 통과한 사유는 어디로 향하는가
[고요는 끝이 아니라 방향의 시작이다.]
고요는 멈춤이 아니다.
사유가 다시 움직이기 직전,
가장 낮은 호흡으로 존재하는 상태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서
사유는 비로소
외부의 소음이 아닌
자신의 리듬을 듣기 시작하고
사유의 리듬을 맞추게 된다.
그래서 고요는 공백이 아니라
방향이 태어나는 시간이다.
보이지 않던 길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경계가 무너질 때 드러나는 리듬 — 거슈윈 이후]
거슈윈의 음악이 그 지점을 통과한다.
그는 클래식의 단단한 형식 속에
재즈의 즉흥성과 흔들림을 끌어들였다.
엄격한 구조는 무너지지 않았지만
그 안의 공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질서는 그대로인데
숨 쉬는 방식이 바뀐 것이다.
선율은 규칙을 따르면서도
동시에 자유롭게 미끄러지고,
그 미묘한 긴장 속에서
전혀 새로운 균형이 태어난다.
이 균형은 질서도 아니고
무질서도 아니다.
둘이 서로를 지우지 않고
함께 살아 있는 상태,
하나의 리듬으로 공존하는 상태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장르를 설명하기보다
경계를 경험하게 만든다.
클래식의 질서와 재즈의 무질서를
거슈윈은 엄격한 클래식의 형식(질서) 안에
재즈의 자유분방한 즉흥성(무질서)을 집어넣었다.
이것이 사유문명론에서 말하는
무질서의 질서를 청각 화한 결과물이다.
* 전무후무한 '글리산도(Glissando)'의 충격
거슈윈의 클라리넷은 계단을 무시하고 슬라이드를 타듯 무질서하게 미끄러져 올라간다
이 연주는 아주 매끄럽고 예의 바른 소리가 아니다.
재즈 특유의 익살(Humor)과 애환(Blues)이 섞여 있어 굉장히 사람냄새가 나는 인격의 결을 닮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소리가 아니라,
삶의 밑바닥을 훑고 올라오는 듯한 거친 질감이다.
이 소리를 통해 완벽한 질서보다,
흔들리고 미끄러지는 무질서 속의 생명력이
진짜 아름다운 인격의 결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고요를 통과한 사유의 방향]
고요 이후의 사유도 같다.
형식에 갇히지도 않고 자유 속에 흩어지지도 않는다.
대신
질서와 무질서가 겹쳐지는 가장 얇은 경계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사유는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설명으로 존재를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리듬만 남는다.
그리고 그 리듬은 말보다 느리지만
시간보다 오래간다.
그래서
고요를 통과한 사유는 세상을 설득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방향을 바꾼다.
보이지 않는 각도로,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이어 <사유문명론 69편 - 고요을 통과한 사유는 무질서의 상태를 어떻게 결로 새기는 가>로 이어집니다.
*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소년의 노래>를 주무시기 전에 들어보시길.
자기 전에 듣기에는 부담이라 느끼실 분도 이해함.
이 곡의 가사는 성경의 다니엘서에 나오는 '불가마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세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고통스러운 불길(무질서) 속에서도 자기만의 노래(리듬)를 잃지 않는 소년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