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기를 향한 첫 발걸음

갈 것인가, 말 것인가

by 김윤선

“야, 너 무슨 보험 파는 아줌마냐? 그 가방 꼭 보험 파는 아줌마들이 들고 다니는 것 같아”

지금으로부터 약 18년 전 그 당시에 100만 원이 훌쩍 넘는 속기 자판을 담은 나의 촌스러운 속기가방을 보고 친구들은 보험사 아줌마 같다고 놀려댔었다. 그도 그럴 것이 A4용지보다 살짝 큰 속기 자판을 담아야 하는 속기 가방은 너무나 정직하게 네모 반듯하여 누가 봐도 보험서류를 넣기에 아주 적절해 보였다.

“야 그래도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우리 엄마가 시골에서 밭일, 논일 해가며 벌어서 사준 거다 임마. 이거 진짜 비싼 거야.”

“야 그래도 속기는 좀 아니지 않냐? 무슨 속기사야, 토익이나 공부해라. 요즘은 무조건 토익 점수 높아야 취업 잘 되는 거 모르냐? 그리고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속기사라는 직업 이제 곧 사향성 직업이래.”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라는 말을 자주 남발했던 그 친구는 공무원 아빠를 두었던 친구였다. 시골에서 힘들게 농사를 짓는 우리 부모님과는 달리 부모님 모두 공무원이셨던 친구는 말을 하기에 앞서 항상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라는 말을 마치 화려한 수식어처럼 붙여댔다.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모두 그 이상한 수식어를 달고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는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나면 모두 다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수긍하기에 바빴다.


대학교 2학년, 갓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사향성 직업이라는 말에 덜컥 겁이 났었다. 사실 사향성 직업이라는 말의 뜻도 정확히 몰랐던 나는 사전으로 검색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정확한 뜻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뒤진 끝에야 지레짐작했던 대로 ‘이제 곧 죽어가는 직업.’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직업도 죽어가는 수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생물도 아닌 것이 어째 죽는다 말인가 하며 한 며칠은 고민 속에서 혼자 허우적댔었다. 친구의 아버지이자 현직에 계시는 공무원 아저씨가 하는 말이니 당연히 신뢰가 갈만한 이야기였다. 곧 죽어간다는 직업을 향해 계속 내달려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만둘 수 있을 때 그만 두고 재빨리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기계 값으로 100만 원 이상이 들어간 마당이니 정말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중력을 잃고 허공 속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나는 금수저니 은수저니 하는 요샛말로 어느 수저에도 해당되지 않는 그저 가난한 농부의 딸이었다. 가난한 농부가 남의 집 밭일을 해가며 하루 일당으로 겨우 3~4만 원을 받아 힘겹게 마련해준 기기였다. 그 가난한 농부를 떠올렸다. 가난한 농부에게서 항시 뿜어져 나오는 흙내를 떠올렸다. 나에게 있어 엄마의 냄새는 흙냄새였고 땀 냄새였다. 흙냄새가 적절이 어우러진 엄마의 땀 냄새가 좋아서 나는 줄곧 엄마의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직업이 설마 죽겠어? 지깟게 무생물 주제에 죽긴 뭘 죽어? 그래, 누구든, 무엇이든지 간에 그냥 믿고 한번 해보자.’


그렇게 누구를 향한 것인지, 무엇을 향한 것인지도 모를 두루뭉술한 믿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속기사라는 직업이 죽지 않을 거라는 애매한 믿음과는 반대로 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하나의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그건 바로 .....


(다음 2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