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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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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철단골 Oct 05. 2019

마녀_6

외부인력

은진은 이럴 줄 알았으면 왜 진작에 안 했나 싶을 정도로 일이 재미있었다. 지수와 수진이 이런 식으로 일했던 거구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지수는 상업적인 감은 좋았지만 전문적인 지식은 좀 떨어졌다. 반대로 수진은 전문적인 지식은 좋았지만 브러시를 지수만큼 잘 이해하진 못했다.


은진과의 업무 분장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진행됐다. 지수가 브러시에서 팔고 싶은 제품을 뭔가 추상적으로 설명하면 은진은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 들었다. 은진과 종찬도 그랬다. 은진이 개떡 같이 설명하면, 종찬이 찰떡 같이 알아듣고 필요한 정보를 요약해서 메일로 보내줬다. 이를테면 브러시의 첫 뷰티 제품은 이렇게 출시 됐다.


"요새 틴트가 뜨다가 좀 갔자나. 그래도 그렇게 립그로스 기다란 거로 바르는 거는 계속 마니 나오던데?"

"아, 스펀지 어플리케이터?"

"어, (샤넬 립글로스를 꺼내며) 이런거 있잖아. 그런데 요새는 되게 매트하고 두껍게.. 음.."

"립글로스보다는 더 컬러가 더 선명한..? 아, 그런거 찾아놨었는데.. 잠시만 (잡지에 붙인 포스트잇을 찾으며) 페리페라에서 나왔는데 립틴트라고 한대, 이런 걸."

"어, 뭐 그런건가..? 무튼 립스틱처럼 색 올라오는데, 립스틱보다는 부드럽고 잘 밀착 되는 느낌, 그런거."

"알마니 립 마그넷 같은 제품 말하는 것 같네. 맞어, 우리는 패션 브랜드에서 출시하는 뷰티니까 뭔가 이런 쨍한게 좋은 것 같애."

"알마니 그거는 진짜 발림성이 역대긴 하더라. 맞아. 패션 브랜드니까 좀 그런 상품부터 내 보면 어떨까?"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차피 같은 몰에서 팔 거니까, 약간 우리 옷이랑도 연결해서, 지수 대표(친구여도 호칭은 꼭 대표를 붙였다. 그러나 '님'자 까지 붙이진 않았다.)가 입고 바르고 해주면 딱 일 것 같애. 아 맞어, 종찬 과장이 요새는 인플루언서 브랜드는 개발 과정도 보여준다던데?"

"뭔 소리야, 개발 과정을 어떻게 보여줘?"

"(다른 인플루언서들 사진 보여주며) 이렇게. 그냥 이런 샘플들 가지고, 막 괜히 백번 돌려 보냈다, 이렇게 올리는거야. 지수 대표 같은 사람이 뭐 명품 화장품 돈 없어서 못 써봐겠어? 다 써봤는데도 만족하지 못한 그녀, 드디어 직접 화장품을 낸다, 이런 얘기 썰이 풀리는거지."

"아, 그래? 하긴 이런 거 나도 많이 본 것 같아. 그리고 뭐, 사실 백번 돌려 보냈다고만 안 쓰면 거짓말도 아니잖아. 난 내 인스타에 구라는 치기 싫더라."

"그치 그치, 백번은 그냥 설명하느라고 표현한거고, 그냥 알아서 센스 있게 쓰면 돼. 지수 대표 글빨 하나 끝나잖아."

"오케이 오케이, 보도자료도 나가고, 홍보도 이 방향으로 하면 좋겠네. 오프라인 이벤트 같은거 좀 하고."

"홍보 윤지 대리가 이미 작업 중이야. 오프라인은 아직 이른 것 같고. 아무래도 가성비가. 지난 번에 브러시 FW로 팝업했는데 반응은 좋았는데 투자대비 비용 핵안습이었잖아."

"아 맞어. 내가 또 정신 못차렸네. 미쳤나봄. 그럼 일단 립 제품으로 하고, 우리 느낌적인 느낌 잘 전달해서 샘플 받아 보자. (파우치 뒤적이며) 여깄다, 알마니 립 마그넷, 이것도 갖다줘. 이 사용감인데, 좀 더 촉촉하면 좋겠다고 해보자."

"제품은 거기서도 백만번 봤을 거라서, 아무튼 알았어. 수진이한테 다음 시즌 출시할 옷들이랑 어울릴 컬러들 시장에 나와 있는 제품들 중에 어떤걸로 하면 될지 찍어 달라 했어."

"완전 좋은 아이디어다. 알았어, 그럼 다음에 샘플 가지고 미팅 하자."


비전문적인듯 전문적인듯 어딘가 경계에 있는 대화를 바탕으로 김종찬 과장과 미팅을 한다.


"과장님, 요새 유행인 이런 립제품들로 우선 FW에 출시해보기로 했어요."

"(제품 훑어보며) 리퀴드 립스틱, 립라커, 립잉크 이런 느낌이네요."

"아, 요샌 이런 제품을 그렇게 불러요? 틴트 아닌가."

"틴트보단 좀 더 발색력이 좋고, 사용감이 매트하죠."

"또 이렇게 과장님한테 하나 배우네요. 컬러는 패션사업팀에서 준게 있어요. 얘네들 같은 컬러로 맞춰 달래요."

"이 사용감에, 이 컬러들로 샘플 보여드리면 될까요?"

"아 맞다, 사용감은 이 제품들보다는 좀 더 촉촉했으면 좋겠다고도 했어요."

"촉촉하게 올릴 순 있는데, 그럼 아무래도 지속력이 떨어지죠.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거예요."

"지속력은 그대로하고 촉촉함만 올려주세요."

"(곤란한듯) 브랜드에서는 다들 그렇게 해달라고들 하시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이런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도 결국 그래서 이렇게 밖에 못내는 거구요."

"그래도 좀 해봐주세요. 뭐라도 다르지 않으면 대표님한테 어차피 컨펌 안나요."

"네 알겠습니다. 용기는 몰드는 안 파시는게 좋을 것 같네요. 공용기 중에 예쁜 것들 몇 개 찾아볼게요."

"그게 뭐예요?"

"(알마니 제품 들고) 이런 용기들 보시면, 딱 이 용기 모양은 알마니 밖에 없잖아요? 이 부분 GA 로고 음각도 그렇고. 다른 브랜드에서 GA 음각 있는 케이스를 쓸 일이 없잖아요. 이런건 몰드 판 거죠. 근데 공용기도 후가공 예쁘게 하면 좋은 거 많아요. 나중에 브러시 뷰티 잘 되면 그 때 부터 다른 제품들부터 용기부터 디자인 해보세요. 지금은 기본적으로 시중에 나와 있는 용기에 디자인을 잘 입혀서 일단 내보시고."


은진은 종찬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업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듯한 배려와 전략적 조언은 김종찬 과장의 특기였다. 사실 김종찬 과장의 회사도 용기를 직접 생산하진 않았기 때문에 용기 몰드를 더 판다고 자기에게 득될 것 없었다. 결국 매출과 이윤이었는데 그건 공용기로도 크게 차이 날 일이 아니었다.


"좋아요. 후가공은 제가 예시를 좀 생각해볼게요. 디자인 아트워크도 좀 드릴테니까 한 번 시범 프린트 해봐주세요."

"아트워크를 벌써요? 허허. 보통 다른데는 사용감이랑 용기 잡고 시작하는데 역시 디자이너시라 다르시네요."

"아 그런 순서가 있어요? 난 몰라. 호호."


그렇게 탄생한 것이 브러시의 첫 립제품, RUSH BRUSH 컬렉션이었다. 총 여섯 가지 컬러로, 브러시 의류와 어울리는 컬러들로 탄생했다. 브러시 옷을 입은 사람들이 급하게 한번만 바르고 나가도 지수의 화보와 같은 룩을 얻을 수 있다는 컨셉이었다. RUSH BRUSH라는 컨셉에 맞게 스펀지 어플리케이터 대신 브러시 어플리케이터를 사용했다. 립틴트도 립라커도 리퀴드립스틱도 아니고 립브러시다라는 컨셉으로 마케팅 활동도 했다. 단순한 상품명이 아닌 립메이크업의 카테고리 이름인 것처럼 포지셔닝하고 싶었다. 화장품에 비전문가여서 도전할수 있었던 과감한 행보였다. 브러시 어플리케이터 쓰면서 단가는 많이 올라갔지만 손익구조에 익숙하지 않은 지수는 원가보다 비싸게만 팔면 남는거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RUSH BRUSH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2만원 후반대 가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은진의 센스로 만든 용기 디자인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웹디자이너였던 은진이 일당백으로 제품 아트워크까지 개발했다. 은진의 팀에 있는 웹디자이너 중 하나가 산업디자인학과 출신이어서 용기 후가공 등을 꼼꼼히 체크했다. 옷보다 빨리 팔리는 립브러시를 보고 지수는 뷰티를 제대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트렌드도 빨리 가고 지는 요즘 같은 시대에, 물들어 올 때 노 젓지 않으면, 파도에 올라타지 않으면, 이 밀물은 곧 썰물이 될 것 같은 본능적인 감각에서였다.


립만 팔던 뷰티 카테고리를 페이스메이크업, 아이메이크업, 클렌징, 스킨케어까지도 넓혀 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뷰티 전문가가 필요했다. 20명까지는 지인의 지인의 지인의 지인까지 총 동원해서 인원을 충원해서 뽑았다. 이번에 처음으로 외부인을 뽑아보기로 했다. 은진이 다니던 전직장의 파트장이나 팀장급도 알아봤지만 연봉이 맞지 않았다. 브러시의 규모 상, 유능한 인재를 데려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사람 구하기 어렵나 싶었다. 구직난이 있다던데, 회사 규모가 작으니 구인난을 겪고 있었다.


그 무렵 한국의 뷰티 제품들이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기사에서는 연일 케이팝과 케이드라마를 너머 이제 케이패션과 케이뷰티가 대세라고 했다. 어떤 곳은 몇십억 규모에서 몇백억 규모 회사가 됐다고 했고 어떤 곳에서는 몇백억 규모에서 몇천억 규모가 됐다고 했다. 어떤 곳은 창업주가 대기업에 회사를 매각하고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을 손에 쥐고 은퇴했다는 소식도 들려 왔다. 그러고보니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필리핀 친구들 때문이었다. 왠지 브러시의 의류와 뷰티 제품은 한국을 너머 중국과 동남아에서도 불티나게 팔릴 것 같았다.


개인 사업 회사에서 제대로 된 기업이 되고 싶은 욕심이 더해지자 사람 뽑기가 쉽지 않았다. 뷰티 팀장 정도를 뽑으려던 계획은 뷰티 패션 마케팅 총괄로 더 원대해졌다. 그 즈음 한 친한 매거진 에디터를 통해서 글로벌 기업의 메이크업 팀장을 하던 사람이 주재원 발령 난 남편을 따라 가서 프랑스에서 럭셔리 비즈니스 관련된 MBA 학위를 따고 최근 한국에 돌아와 일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팀장을 만나볼 수 있겠냐고 물었다. 회사에서 면접처럼 진행하기보다는 외부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를 해보면 좋겠다고 했다.


지수는 한껏 꾸미고 나갔다. 글로벌 브랜드 마케팅 팀장이었던데다가 파리에서 유학을 했다고 하니 더욱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명품으로 쳐바르는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옷은 브러시를 입었다. 브러시 브랜드 오너로서 자부심을 표출하기 위함이었다. 반클리프 알함브라는 이제는 너도 나도 하는 모티브 한 개짜리가 아니고, 20개짜리를 두번 감아서 멋을 냈다. 과해보일까봐 시계나 다른 반지는 하지 않았다. 린디백에 마르지엘라 통굽을 신고, 압구정의 핫한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레스토랑 문이 열렸고, 저 쪽에서 그녀가 들어오고 있었다. 지수는 본능 적으로 패션부터 훑었다. 새까만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 노란 시스루 블라우스, 블랙 청바지, 출처 불분명한 구두를 신고, 고야드 생루이백을 들었다. 생각보다 엄청 패셔너블하진 않다고 생각하며 스캔을 마쳤다. 입구에서 안내를 받은 그녀가 지수를 보더니 다소 부산스럽게 머리를 흩날리면서 처음보는데도 반가운 얼굴로 다가 왔다.


"안녕하세요, 지수 대표님이시죠? 황지선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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