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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철단골 Oct 21. 2019

마녀_12

춘추준비

FW 시즌 준비 막바지가 다다르면서 브러시는 한 껏 더 텐션이 올라 갔다. 패션 사업부에서는 마지막에 부자재 업체에서 부자재 단가가 올라 갔다, 어떤 곳에서는 양산 했더니 컬러가 다르게 나온다, 실무자들이 이런 저런 일들로 수진을 바쁘게 찾았다. 수진은 결혼 준비 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결혼 때문에 여자가 일을 소홀히 한다는 얘기를 듣게 하기 싫어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렸다. 사장과 친구다보니 친구여서 그렇다는 얘기를 듣기 싫어서 더 했다. 차라리 일반 월급쟁이였다면 '덜 잘 하고, 승진 늦게 하지뭐'하면 될 일 이었다.


패션 사업부와 뷰티 사업부 모두 지수 대표에게 최종 보고를 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수진의 전직장에서는 품평회라고 해서 디자인 팀에서 기획한 제품들을 영업 사원들과 공유하는 자리가 있었다. 영업에서는 하나 같이 그 놈의 가격이 너무 비싸니 단가를 좀 낮춰 달라 하지만 퀄리티는 유지해달라는 모순된 요청들 뿐이었다. 하지만 브러시에서는 영업 사원 수도 2명 뿐일 뿐더러 어차피 조직화된 회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수 대표의 보고가 곧 품평회였다.


지수 대표, 황상무, 수진과 은진을 포함한 모든 브러시 직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황상무는 그 날 따라 더욱 더 텐션이 업되어 있었다. 수진은 회의실로 들어오는 황상무의 빠른 걸음도 거슬렸다. 빠른 걸음조차 괜히 바쁜척 하는 것 같았다. 은진은 지난 번보다는 자신의 의견을 잘 주장해보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보고는 패션 제품부터 먼저 이루어졌다. 패션 사업이 훨씬 크기도 하거니와 뷰티는 패션의 컨셉에 따른 제품을 출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수진은 FW의 꽃인 코트와 패딩부터 선보였다. 평소에 친하던 거래처에서 이번에 몽클레어 급의 가벼우면서 따뜻한 패딩을 준비했다고 야심차게 선보였던 소재로 만든 옷이었다. 바스락거림조차 없는 부드러운 겉 소재에 내장재도 일반 패딩보다 깃털의 비중을 높여 80%를 채웠다. 보통 브러시 정도 되는 정가 20만원 언더의 패딩 제품들은 대부분 깃털 비중이 60에서 70%였다. 수진은 몇 년째 지수와 합을 맞춘 경력을 자랑하듯 순조롭게 발표를 이어갔다.


황상무는 처음 듣는 수진의 발표와 지수의 코멘트를 들으며 뭔가 고개를 과하게 끄덕였다. 수진은 그런 끄덕임도 거슬렸다. 뭘 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건지 괜히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모를 땐 그냥 모르는 표정을 지으면 안 되는건지 묻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결혼 준비 중인데 좋은 마음만 먹어야겠노라고 마인드 컨트롤 하면서 참을 인자를 새겼다. 외투는 자신있게 준비하기도 했고 지수와 중간 중간 수시로 디자인 과정을 공유 했기 때문에 큰 코멘트가 없었다. 


다음은 니트류였다. FLUFFY라는 컨셉에 맞게 따뜻한 파스텔톤의 울 소재 니트를 선보였다. 이 또한 브러시의 시그니처 룩이었다. 마른 사람은 오버사이즈로 체구가 더 있는 사람은 넉넉하게 입을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특히 어깨선이 살짝 내려간 디자인이 여성스러우면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수진의 아이디어로 왼쪽 팔에만 살짝 넣은 셔링이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이 있어 수진도 내심 뿌듯해하고 있었다. 목은 칼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살짝만 올라온 정도였다. 지수가 시범 착장을 했고 역시나 하얗고 마른 그녀에게 멋드러지게 어울렸다. 직원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여러 상품을 만들다 보면 강약이 생기게 되는데 이건 강이었다. 그 때 황상무가 나섰다.


- 지수 대표님이 입으면 뭔들 안 예쁘시겠어요. 이렇게 하얗고 예쁘신데. 근데 요즘 모델 계에서도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나 시니어 모델 등이 유행이잖아요. 제가 한 번 입어 볼까요?


수진은 가만히 있어도 거슬릴 정도로 마음이 뒤틀렸는데 왜 저 여자가 갑자기 나서나 싶었다. 여태까지의 보고는 지수 대표만 입어 보고 끝났었다. 하지만 지수는 달랐다. 황상무가 참석한 첫번째 미팅부터 그녀의 요청을 거절하기 애매해서는 아니었다. 자기가 너무 마르고 팔 다리가 길어서 일반인 여성과 체형이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수도 황상무의 그런 포인트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입어보라고 했다. 황상무는 다소 과장된 동작으로 그녀의 옷을 입어 보았다. 황상무도 지수만큼 모델 같은 몸매는 아니었지만 잘 관리한 몸이었기 때문에 니트는 잘 어울렸다.


- 어머, 이거 핏이 너무 예쁘다. 지수 대표님이 완전 모델 각이라면 나는 좀 일반인인데 좀 센스 있게 입은 느낌? 좋아요 좋아요. 이게 10만원도 안하는 거면 완전 잘 팔릴 것 같아요. 사이즈 고민할 필요도 없고. 그리고 심지어 가볍네. 따뜻한 소재 옷이 이렇게 가볍기 쉽지 않은데. 근데 하나 의견 말해도 돼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외국계 뷰티 출신인 그녀가 스타트업 기업에서 다른 분야에서 하는 첫 코멘트가 어떨까 하는 궁금증에 살짝 긴장감이 감돌았다.


- 솔직히, 목이 좀 애매한 것 같아요. 완전 목티도 아니고 아예 라운드도 아니고. 뭔가 계속 오래 입고 있으면 간질 간질 할 것 같아요. 왜 그런거 다 경험하지 않아요? 요즘 실내는 다 엄청 따뜻하잖아요. 그래서 패딩 입고 이동할 때 덥기도 하고 그런단 말이죠. 그래서 저는 외투는 두껍게 속은 가볍게 입거든요.


지수는 일리있는 그녀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게 원래 디자인 의도였는데 패션 출신도 아닌 황상무에게 지적질을 당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그런걸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 말도 안하고 있을 순 없었다. 자신과 같이 디자인한 팀원들의 당황한 표정들이 보였다.


- 말씀하신 부분은 알겠는데요,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이기도 하구요. 홈쇼핑에서도 보면 이런 디자인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실용적인 것이 큰 문제는 아닐 것 같아요.

- 아니 아니, 홈쇼핑에서 하는건 진짜 수만가지 옷들 중에 하나를 저런 디자인으로 내놓는 걸 꺼예요. 그리고 아줌마들 집에서 난방비 아까워서 춥게 하고 있잖아. 근데 우리 타겟은 20대 초반, 끽해야 중반 아닌가요? 걔들은 강의실 늦어서 뜀박질하고 지하철 문 닫힐려고 하면 뛰어 들어가고 할텐데. 내가 아멜리에에 있을 때도 이쁜거고 뭐고 결국 실용적이지 않은 제품은 하나 같이 망하더라고. 난 거기에 또 트라우마가 있어서. 말 할까 말까 하다가 입어보니 목이 역시나 간질 간질 한거죠.


지수는 황상무의 그럴 싸하다고 생각했다. 괜히 비싼 돈 주고 데려온 게 아니구나 생각하면서 뿌듯했다. 지수는 수진에게 수정이 가능하냐고 물어봤다. 수진은 분했지만 감정적으로 나가면 자기만 더 우스워질 것 같았다. 큰 수정이 아니니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목 넓이를 조정해서 두 세가지 안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이 후의 옷들은 모두 순조롭게 끝났지만 수진은 황상무의 피드백으로 니트 수정을 해야 하는 것이 못내 자존심이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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