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품평
은진은 수진이 황상무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알았기 때문에 패션 품평회 때 내심 조마조마했다. 은진이 보기에 지수 대표도 황상무의 동조하는듯 보였고, 솔직히 은진이 보기에도 황상무의 말이 아주 틀린 말 같지는 않았다. 다만 그 동안은 수진이 주도적으로 진행했던 패션 디자인에 지수 대표 외의 누군가 입김이 닿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어서 뷰티 품평이 이어졌다.
은진은 4구 섀도우 2개와 블러시 2개, 그리고 립 8개 컬러를 내놓았다. 특히 섀도우 2종에서는 마지막 한 가지 컬러의 펄감을 달리한 후보들도 잊지 않았다. 립의 경우에는 지난 번 잘 나갔던 3개 컬러에 이번 시즌 컨셉에 맞는 3가지 컬러를 추가로 기획했고, 거기에 수진이 자신있게 내 놓은 패딩 소재와 매우 어울리는 글로스 컬러이며 2개라는 설명도 차근 차근 했다. 황상무는 패션 부문 때보다 더 고개를 심하게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때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은진은 소개하는 내내 지수보다 황상무가 더 신경 쓰이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수는 모든 제품을 열심히 손등 또는 입술에 발라보긴 했지만 이미 기 협의된 내용이므로 딱히 별다른 코멘트는 없다고 했다. 섀도우 2종의 마지막 펄감만 직원들의 의견을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 때 황상무가 입을 열었다.
- 이게 혹시 그 때 제가 말씀드린 코멘트가 반영되어서 다시 온 샘플인가요?
은진은 역시나 이 섀도우에 대해 언급하는구나 싶었다. 이번에는 컨펌을 받아야 빨리 생산 일정을 맞출 수 있어서 어떻게든 결론을 내겠다고 다짐을 거듭하고 들어왔다. 은진이 그렇다고 하자 황상무가 말을 이었다.
- 황상무; 그.. 그 ODM업체 오빠야가 말씀을 잘 못 알아들으신 것 같은데.. 다시 말씀 드리지만 제가 말씀 드렸던건 펄의 농도가 아니고 입자의 크기였을텐데요.
- 은진; 이게 다 입자 크기가 다른 거거든요.
- 황상무; 어머 진짜? 어머 잠깐만. 나 안경 좀 쓰고요. 내가 노안이 아닌데, 내 눈에 안 보일 정도면 진짜 미세하게 조정하셨나보다.
황상무는 몽블랑 안경을 썼다. 여자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브랜드였다. 아멜리에라는 브랜드를 겉에서 보면 모두 화려한 디자이너 브랜드로 치장했을 줄 알았는데 황상무는 은근 그렇지 않았다. 되려 투박한 면도 있었는데 몽블랑 안경처럼 가끔 의외의 포인트에서 예상치 못한 브랜드를 사용하기도 했다. 안경을 쓴 황상무가 말을 이어갔다.
- 황상무; 아 정말 쬐~끔 다르네요. 아유. 난 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이크로 펄 같은 걸 기대했던건데. 역시 인터코스모는 메이크업은 아닌건가.
- 은진; 크기도 다르고 함유량도 조금씩 달라서 어쨌든 발랐을 때 펄이 보이는 정도는 확연하게 다르거든요. 상무님이 원하시는 그런 은은한 느낌으로 빼 본 게 첫번째 샘플입니다.
- 황상무; 이 정도가 아닌데. 나스에서 나오는 섀도우 있는데 제가 쓰던 거긴 한데. 이럴까봐 제가 가지고 왔거든요. 여기 보세요. 이를테면 이 정도요. 대표님도 발라 보시죠. 이거 진짜 잘 나가는 거 아시죠. 나스가 요즘 진짜 컬러를 잘 뽑더라구요.
- 지수; 아, 정말 은은하게 발리고 일단 발림성이 다르긴 하네요. 은진 팀장님, 코스모인터에 이런 식으로 좀 달라고 해달라고 할 수는 없을까요?
- 은진; 그 정도까지 은은한 펄감 줄 수 있는지는 알아 봐야겠지만 어쨌든 처음에 받았던 것보다는 이미 많이 조정된 거라서요.
- 황상무; 처음이 기준이 될 순 없는거죠.
- 은진; 처방 확정 해야 아트워크 같은 것도 기획이 되는 거라서요. 오늘 최종 의사 결정 되지 않으면 일정이 미뤄질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 황상무; 제가 늦게 입사해서 죄송한데,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상품으로 내는 건 너무 트렌드에 뒤떨어지는 것 같고, 아니면 늦어진다고 하고. 업체를 좀 쫘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는 이미 4색 팔레트로 낸다는 기획부터가 좀 아쉬운데요.
- 은진; 업체가 아니라 코스모인터구요. 저희가 초기에 대략적인 원가 받아 봤을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갑자기 비싼 가격으로 내려니 소비자들 반응도 좀 조심스러웠고요. 이번 FW 판매되는 추이부터 좀 보고 내년부터 완전히 연간 운영할 때, 그 때 고민해보면 어떨까 했어요.
황상무는 머리를 역결로 넘겼다. 역결로 넘긴 머리가 다시 스르르 내려오더니 이마를 덮어서 일자 머리가 된 모양새가 되었다. 시선은 잠시 책상을 바라봤다. 어딘가를 쏘아 보는데 어딜 보는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 황상무; 제가 너무 이해가 안 돼서 그래요. 우리는 지금 트렌드에 어울리지도 않는 4구 팔레트를 내려고 하고 있고 거기에 그 중 하나는 제가 도저히 바를 수 없는 이상한 펄이 들어 있구요.
- 은진; 그 동안 진행해오던 건이구요, 내년에 정식으로 뷰티 런칭할 때..
- 황상무; 아니 아니, 자꾸 디펜시브하게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 회사에 뷰티 전문가가 없잖아요. 저 밖에 없잖아요. 시시비비를 가리자는게 아니라 그 동안 어떻게 해왔는지를 들으려는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건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는데요. 내년 정식 런칭은 내년 정식 런칭 때 따로 얘기하고요. 여태 이렇게 진행 했으니까로 납득될 수 있는거, (립 제품을 들었다.) 립 이거, 이거는 뭐 좀 아쉬운대로 내볼만 할 것 같아요. 근데 이 섀도우랑 블러시는 제가 도저히... 휴...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하나.
황상무는 갑자기 양손으로 머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지수 대표가 나섰다.
- 지수; 상무님 말씀은 알겠는데 팀에서 열심히 해온 거고 패션 부문하고도 다 미리 협의하면서 진행한 거예요. 스팟성 컬렉션으로 실험적으로 하는 거니까 우선 가볍게 가보죠.
- 황상무; 아 네. 제가 온지 얼마 안 돼서 워킹 컬처에 적응 하는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근데 지금 최근 패션 브랜드에서 이렇게 컬렉션이랑 엮어서 하는 트렌드라던지 백스테이지 메이크업 이런 제품들에 대한 조사도 안 되어 있는 것 같고. 전 이런 걸 본적이 없어요. 제가 도저히 어프루브가 안 돼서요.
그 때 보다 못한 수진이 나섰다.
- 수진; 상품 기획은 은진 팀장과 제가 지수 대표님 전결로 진행했던 건입니다.
- 황상무; 아, 회사에 아직 그런 프로세스도 없구나. 어떡하지. 일이 더 늘어 나겠네. 대표님, 우리 조직도 R&R 좀 다시 한 번 봐야될 것 같아요. 좀 클리어하게 디파인하지 않으면 계속 산으로 갈 것 같애요.
지수도 순간 기분이 상했다. 자신이 은진과 수진과 함께 일궈온 회사였다. 취업이 힘들던 때 은진과 수진의 도움이 없었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사실 지수도 내심 패션에서 수진이 아닌 황상무의 편을 든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순간 딴에는 회사가 커지는 과정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은진에게 하는 황상무의 태도는 좀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 지수; 일단 이번 시즌까지는 그 동안 진행했던대로 하시죠. 다음 시즌부터 좀 더 미리부터 황상무님 인볼브 하시구요. 그리고 이번 시즌 제품 발주 들어가자마자 바로 내년도 정식 런칭할 브러시 보떼도 다시 얘기 해보면 될 것 같습니다.
- 황상무; 아우.. 그래요. 어쩔 수 없죠.
- 은진; 그럼 섀도우에 나머지 한 가지 컬러는 지수 대표님이 골라주신 가장 미세한 펄로 진행하겠습니다.
- 지수; 네, 그렇게 해주세요.
- 황상무; 블러시는요.. 블러시도 굳이 굳이 나와야 되는거죠?
- 은진; 반응이 좋은 컬러로 잘 나왔는데요.
- 황상무; 아니 아니, 컬러 반응 말구요. 시장 자체가 작은데 우리가 굳이 그 시장에 들어가는게. 차라리 튜브로 하이라이터나 컨실러 만들면 이익률이라도 좋을텐데.
- 수진; 패션 룩북 기획도 다 저 메이크업 제품들 한걸로 찾았구요. 헤어랑 스타일리스트들도 블러시까지 얹은 걸로 안(案) 을 짜고 있습니다.
- 황상무; 아니 브러시가 언제부터 어차피 그 동안 룩북 쓰인 메이크업 제품 다 출시했던 브랜드도 아니고.
수진이 발끈했다.
- 수진; 상무님 말씀을 좀..
지수가 수습했다.
- 지수; 자, 모두 그럼 컨펌 난걸로 하구요. 은진 팀장님 부자재 발주 하시다가 혹시 불분명한거 있으시면 따로 저랑 한 번 더 보구요. 이번 FW도 잘 될 것 같아요. 수고하셨습니다.
회의실을 떠나며 지수는 황상무에게 따로 연락했다.
'저랑 밖에서 차 한잔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