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멈춰 세운 문장들, 첫 번째 기록
무언가를 기록하고 싶은 갈망이 내 안에서 꿈틀댔지만, 단조로운 일상 안에서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늘 망설였습니다. 그러다 결국 가장 가까운 곳, 책꽂이에 눈이 머물렀습니다. 제 삶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책'에서 글의 재료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중 어린 시절부터 추천 도서 목록에서 늘 마주했던 박완서 작가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다시 펼쳤습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니 문득 '나는 왜 그동안 한국 문학을 등한시해 왔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게 되더군요. 가장 익숙해야 할 우리의 이야기에 낯선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이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생각과 고민들을 기록하면 되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서울내기인 이상의 감수성이 만들어낸 관념의 유희일뿐 정말은 그렇지 않다. 시골 애들은 심심해서 어떻게 살까 불쌍하게 여기는 건 서울내기들의 자유이지만 내가 심심하다는 의식이 싹트고 거기 거의 짓눌리다시피 한 것은 서울로 오고 나서였다.
나는 시골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고 항상 도시에서 살았다. 그러나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일하시던 바닷가 근처를 여동생과 돌아다니며 놀았던 기억은 그 시절의 평화로움을 불러일으킨다. 그 시절은 참 좋았는데, 돌이켜보면 '심심함'이나 '결핍'은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도시화된 이후의 의식에서 온다는 작가의 통찰이 깊이 공감된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는 동안에 수없는 선악의 갈림길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에 찌든 30대 후반이 되고 나서 인간에게 혐오감을 느낄 때가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이 문장이 나를 대변해 주는 것 같아 위로가 된다. 모든 사람은 선천적인 악인이라기보다는, 사는 동안 마주친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이 지금의 그들을 만들어냈을 뿐이라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여북해야 그 무렵 나는 북조선이 과연 노동자의 낙원일까를 의심하는 것보다는 북조선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인구를 증가시킬까를 궁금해하는 게 훨씬 재미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재미있고 싶었다.
이 문장이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인 것 같다. 굵직한 역사적 내용들(일제강점기, 해방, 전쟁)이 배경이 되지만, 한 여자아이의 시선은 심각함 대신 생존과 재미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아이가 어떻게 삶의 활력을 찾아서 인생을 사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너무 심각하지 않아서 더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 책은 단순한 성장 소설을 넘어, 나 자신과 한국의 역사, 그리고 내가 외면했던 '우리의 이야기'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책을 덮은 지금, 다음 한국 문학 작품을 펼치고 싶은 갈망이 꿈틀거립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기록을 망설이던 저에게 글쓰기의 방향을 잡아준 소중한 첫 작품이 되어주었습니다.
오늘의 밑줄이 내일의 기록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