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비공 Sep 14. 2018

로베르트 슈만 - 아동학대곡

river flows in you 레슨을 졸업하자. 선생님이 다음부터는 좀 쉬운 곡으로 가자고 말씀하셨다. 피아노 레슨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안 받아보신 분들이 혹시 오해할까봐 밝히자면 초보단계에서 한 곡의 레슨을 끝냈다는 것이 그 곡을 완벽하게 마스터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 곡을 완성의 경지에 오르게 연습하는 것은 몇 년 내지는 몇십 년이 걸릴지 모를 기약없는 과정이다. 초보 단계에서는 다양한 곡과 다양한 테크닉을 접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미스터치 별로 없고 다이내믹 어느 정도 살려주는 수준이 되면 그 곡 레슨을 끝내고 다른 곡 레슨으로 들어간다. 이때까지 내가 두 곡의 레슨을 끝냈지만 그건 두 곡을 완벽하게 연주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대로 들어줄만하게 칠 수 있는 게 두 곡이라는 의미이다. 아무튼 선생님이 당분간 소품 위주로 가자고 했고, 나 역시 이루마의 쓴맛을 단단히 본 터라 단계를 밟아가며 차근차근 올라가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해 선뜻 응했다.

처음 선생님이 권한 곡은 로베르트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가운데 1번곡 '신기한 나라와 사람들'이었다. 빠른 곡은 아니지만 여기에도 처음 접하는 테크닉들이 등장했는데, 정말 신기할 정도로 빨리 끝냈다. 첫 레슨 때 별다르게 미스터치 없이 연주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두 번째 레슨 때는 다이내믹도 왠만큼 살리는 수준이 되었다. 세 번째 레슨 때 이 곡은 졸업을 하게 되었다. 곡을 빨리 끝낸다고 놀라신 선생님이 다음 곡을 또 어린이의 정경으로 가자고 하신다. 처음에는 이 곡집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인 7번 '트로이메라이'를 선택하시더니만 갑자기 '아냐, 이 곡은 너무 흔해서 마음에 안 들어.' 이러더니 8번 '난롯가에서'가 대단히 재미있는 곡인데 다들 안 친다며 그 곡을 하자고 말씀하셨다. 어린이의 정경은 많이 들어보지 않은 음악이라 1번과 7번 말고는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러자고 승낙했다. 사람들이 잘 안 치는 곡이라면 분명 무슨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인데 확인도 안 해보고 덜컥 승낙했던 나의 무모함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이루마와는 비교가 안 되는 헬 게이트를 내 손으로 열고 말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LdLYWM7gREE


일단 이 곡의 악보를 처음보았을 때 느낌은 웬 음표가 이리 많은가 하는 것이었다. 이 곡도 왼손의 오지랖을 엄청나게 요구하는 곡이다. 그리고 손을 벌려서 낮은음과 높은음을 동시에 쳐야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연주를 해보니 단순히 손을 넓게 벌리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요상한 손동작을 강요하고 있다. 오른손으로 파와 높은 도를 짚는데 그 와중에 왼 손으로 도와 오른 손의 파보다 3도 높은 라를 짚어야 한다. 즉 벌린 오른 손 사이로 왼손 엄지손가락이 들어와야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피아노 연주 동영상을  보면 왼손이 오른손을 넘어가서 더 높은 음을 연주하거나 오른손이 왼손을 넘어가서 더 낮은 음을 연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처럼 벌린 오른 손 사이로 왼손이 끼어드는 경우는 처음 접해보았다. 그냥 왼손이 도와 파, 오른손이 라와 도를 치도록 악보에 지시가 되었으면 서로 편했을 텐데 왜 이런 이상한 손모양을 강요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손이 겹치다보니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서로 충돌하는 참사가 발생한다. --; 그걸 피하게 위해서는 왼손으로 건반 위쪽을 쳐야하는데 그 부분을 치면 소리가 잘 나지 않기 때문에 힘을 주어야 한다. 이 괴상한 손모양 몇 번 하니까 팔이 끊어질 정도로 아프다. 엄청나게 힘센 사람 둘이서 하나는 손목을 잡고 하나는 팔꿈치를 잡은 뒤에 서로 반대 방향으로 비트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참 낑낑대며 연습하던 중에 내 손 모양을 우연히 보자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거 목 조르기 딱 좋은 동작인데, 혹시 이것은 소림파 용조 금나수가 아닐까? 알고보니 슈만은 무림의 초절정고수로 본인의 무공을 악보에 숨겨놓아 이 악보를 연습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용조금나수를 습득하도록 안배를 한 것일까. 그러고보니 피아노를 친다는 행위 자체가 손가락으로 사람의 혈도를 짚는 지혈무공과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사조영웅전에서 왕중양이 구양봉을 박살낸 일양지, 의천도룡기에서 성곤이 명교 수뇌부들의 내분을 이용해 한 번에 모두를 제압했던 현음지와 같은 계열이다. 피아노를 배우면 저절로 익히는 절정 무공 풍금지로 무림을 제패하는 고수의 이야기를 담은 무협소설이나 한 번 써볼까? 그러고보니 예프게니 키신이 피아노를 칠 때의 동작이야말로 사조영웅전에서 매초풍이 구사하는 구음백골조와 같은 모양이 아니던가. 아무래도 피아노와 무공 사이에 무슨 연관관계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https://www.youtube.com/watch?v=M2beoK2wSng

(하지 말라는 나쁜 자세는 다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피아노는 잘 치는 신기한 넘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zLQSzwWrfy4

(이 언니야가 피아노 쪽으로 재능을 살리셨으면 초일류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셨을 텐데 아까운 재능을 살인에 낭비했다.)

게다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중복된 음표가 많다. 왼 손과 오른 손이 같은 건반을 누르도록 지시된 부분이 몇 군데 있다. 한 손가락으로는 힘이 모자라니 두 손가락의 힘을 모아 강하게 쳐달라는 뜻일까. 안 그래도 자주 부딪치는 양손이 이 대목에서 계속 접촉사고를 일으킨다. 왜 이런 식으로 작곡을 했는지 선생님께 물어보니 왼손의 리듬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하던데 별로 납득은 안 갔다. 구태여 이런 식으로 리듬을 살려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결국에는 내 맘대로 악보를 고쳐서 이런 대목은 모두 한 손으로 처리하고 말았다.

더구나 이루마를 연습할 때 고생했던, 오른손 멜로디는 그대로이나 왼손 반주만 살짝 바꾸기 신공이 이 곡에도 몇 차례 등장한다. 악보를 잘 안 보는(본다고 뭐 달라질 건 없지만) 나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런 대목에서 잘못된 화음을 누르고 그러면 어김없이 '악보 보세요'라는 선생님의 지적이 시작된다. '악보를 안 보니까 자꾸 틀리잖아요.' '어후, 이 놈의 자식도 이루마같은 짓을 하고 있네.'하고 한 마디 했더니만 선생님이 기겁을 하며, '어떻게 슈만을 이루마하고 비교해요?'라고 항의한다.

불과 네 마디짜리 짧은 곡이지만 한 마디 더듬더듬 건반 짚는데 한 주씩 꼬박 한 달이 걸려서야 겨우 마지막까지 건반을 눌러보았다. 아무래도 난이도가 내 수준에 비해 턱없이 높은 것 같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렸지만, 활짝 웃는 얼굴로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저만 믿으세요. 아자아자 화이팅!' 이런 소리만 하고 있다. --;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내 선생님이 좀 노다메 과이다. 화이팅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으면 차라리 화이팅 열 번 하고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치겠다. --;

이 곡은 많이 연습도 못했다. 두 번만 치면 천하장사가 팔을 뽑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와 더 연습하기가 힘들고 두려워진다. 음악이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레슨이 있는 날이면 나는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선생님께, '어휴 선생님, 어쩌죠? 오늘 일이 좀 빡세서 팔뚝이 아파요.' 이러면서 팔뚝을 주무른다. '어쩌라고요?', '아, 그냥 이따가 레슨 시간에 제가 잘 못하더라도 이해해주십사 하는...' 나는 내 성격이 강직한 편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아부에 이처럼 소질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몇 번 이렇게 엄살을 부렸더니만 요즘에는 내가 힘들다고 해도 믿지도 않는다. 요 며칠 전에 진짜로 손목을 다쳤는데 그것도 엄살 취급을 했다. --;

이루마가 그냥 커피라면 이 곡은 T.O.P라고나 할까, 갖가지 방법으로 집요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슈만에게 학을 떼었다. 레슨 시간에 연습이 잘 안 되면 이런 식으로 투덜댔다. '이놈의 자식, 이런 곡이나 작곡하니 손가락이 망가지지. 일단 슈만은 헤어스타일부터 마음에 안 들어.' 슈만을 좋아하는 선생님은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질색을 한다.

전문가들은 어떻게 연주하나 싶어서 유튜브를 검색하다가 마르다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들었다. 내가 쩔쩔매는 부분들을 너무 쉽게, 피아노(p)톤으로 구렁이 담넘어가듯이 넘어가버린다. 뭔가 사기를 당한 기분이다. 레슨 시간에 이걸 말했더니만 선생님은 마르다 아르헤리치는 테크닉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라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부드럽다 못해 조용한 느낌까지 드는 아르헤리치의 연주보다 통통 튀며 신나게 연주하는 선생님의 연주가 더 마음에 든다. 노다메라 그런지 선생님은 발랄한 곡 신나게 연주하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 같다. 물론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바로 옆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이 평가는 바뀔 확률이 크다.

학원에 다닌지 몇달째가 되자 서로 인사하는 수강생들이 좀 생겼다. 요즘 무슨 곡 연습하시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했다. "슈만의 아동학대곡이요." 그러면 하나같이 눈의 휘둥그레지며 '예? 그런 곡이 다 있나요?'하고 반문한다. 그럼 이렇게 대답해준다. '있더라고요. 난롯가에서 말썽피우는 아이들을 잡아다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기 고문하는 것 같은 심상의 곡이예요.'

처음 시작할 때 선생님은 두 달이면 될 것이라고 말하고 나는 석달은 걸릴 것 같다고 말했는데 석달이 되어도 별다르게 는 것이 없다. 사실 늘기는 많이 늘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선생님이 옆에만 앉으면 연습의 성과는 하나도 반영되지 않고 정확히 그 전주에 했던 연주와 똑같은 퀄리티의 저질스러운 소리만 흘러나온다. 상황이 이러니 아무리 연습해서 늘었다고 항변해도 선생님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석달째가 되자 너무 이 곡 가지고 질질 끈다고 당분간 보류하자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사실 두달째 되던 시점에도 같은 제안을 하신 바 있는데, 앞의 글에서 말했다시피 나는 이상스런 고집이 있는 사람이다. 누가 이기나 반드시 끝을 보겠다고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한 달을 더 해본 결론은, 아무래도 좀 쉬운 곡을 많이 연습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아 고집을 꺾었다.

그래도 이 곡을 연습한 덕에 습득한 테크닉들이 좀 있다. 대표적인 게 슬러로 연결된 음의 뒷음 힘빼기 같은 것, 초보자가 그 느낌을 살리기가 꽤 어렵다고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다. 소림파 용조금나수는 여전히 버겁다. 그렇지만 이 곡을 연습한 가장 큰 성과는 수준에 안 맞는 난이도의 곡은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연습의 지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이루마의 쓴맛을 느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