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출퇴근 시간을 채우는 방법
조용한 건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라서요
누군가는 조용한 시간을 즐긴다고도 하는데, 나는 전혀 그러지 않는다. 가만히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침묵은 내게 다른 의미의 압박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구나, 하고 누가 혼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출퇴근길이 그렇다. 땅바닥에 버리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고, 조용한 시간이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오늘은 이 시간을 채우기 위한 나의 노력을 간단히 소개해볼까 한다.
나의 옛 자동차, 지금은 폐차된 하늘색 베르나는 아주 옛날 연식이었다. 연식이 된 차엔 종종 CD 플레이어 같은 것이 붙어 있곤 한다. 누군가에겐 장식이던 것이겠지만, 내겐 집에만 두고 썩혀 놓은 앨범들을 들어볼 좋은 기회였다. 처음엔 내가 좋아한 애니메이션 앨범이었다. 그러다가 너무 같은 음악을 반복해 듣는 게 힘들어졌다. 그래서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샀고, 이후 클래식 앨범도 중고로 사들였다. 바리에이션이 넓어지며 익숙한 노래가 많아지는 것은 어쩐지 뿌듯했다.
음악은 빈 공간을 채워줄 좋은 나의 친구였으나, 아무래도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지금 당장 원하는 노래를 지금 당장 들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CD를 한 장 사면 지겹도록 들어야 한다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빠르게 음악에 지쳐버린 나는 곧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자동차마다 없을 리 없는, 라디오였다.
라디오는 재미있었다. 방송을 듣다 빨간 불이 되면 잽싸게 퀴즈의 답을 문자로 보내곤 했는데, 그렇게 해서 상품을 받은 적도 있었다. 매일매일 다른 방송, 다른 내용은 흥미를 끌었다. 시사적인 내용을 이야기할 때에는 내가 좀 더 똑똑해진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라디오의 문제점은, 이상할 정도로 지직거리는 소리가 많이 난다는 것과 (이건 내 차량 문제일 수도 있겠다) 광고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퇴근길에 자주 듣던 라디오를 그 이유로 끌 수밖에 없었다. EBS는 자주 듣기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고, 클래식 채널은 아침에 듣기엔 너무 졸렸다. 점점 라디오가 지루해지는 순간이 왔다.
그 당시쯤 사고가 나 차를 바꾸게 되었다. 전 재산을 탈탈 털어 산 새 차는 옵션도 제대로 붙어 있지 않아, 이전 차에서처럼 CD를 들을 수 없었다. 어쩔까, 하던 내게 친구가 나의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알려 주었다 AUX선을 연결해서 스마트폰의 음향을 차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신세계가!!! 그렇게 나는 내 휴대폰의 음악을 출퇴근길에 즐길 수 있었다. 한동안은 정말 신세계라고 생각했다. 출근길은 즐거웠고 퇴근길은 유쾌했다.
여기서 문제는, 내가 생각보다 같은 노래를 무한 반복해서 듣는 타입이라는 것이었다. 좁은 풀의 노래를 무한 반복해서 들으면 누구라도 질리기 마련이다. 나는 그만 내가 좋아하는 모든 노래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늘 들리던 음악이 지긋지긋해서 출근길에 노래를 끄고 달리던 날, 나는 깨닫고야 말았다. 이 공간을 채울 다른 무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유튜브를 들을까도 했으나, 내 휴대폰 데이터가 충분치 않았으므로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내가 가입해 둔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아주 좋은 것을 발견했다. "전자도서관" 이게 뭐지 싶어 들어가 보니 전자책과 오디오북, 그리고 몇 가지 인터넷 강의 등이 있는 사이트였다. 순간 이거다 싶었다. 그동안 미뤄두고 던져둔 독서를 다시 시작할 시간이 된 것이다.
오디오북 파일을 몇 가지 다운받아서 들었다. 생각보다 책 한 권을 떼는 것은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좋았다. 나는 이제껏 내가 완독한 적 없던 '앵무새 죽이기'를 오디오북으로 다 읽을 수 있었다. 한 줄도 빼먹지 않고 다 들어서! 굉장한 일이었다. 속독하는 버릇이 있어 지루한 부분을 제멋대로 빼먹고 읽는 내게, 오디오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차분함과 한 단어도 놓치지 않는 섬세함, 그리고 한 권의 책을 출퇴근길에 다 읽는다는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다만 오디오북은 그 종류가 많은 편이 아니었으며, 나는 같은 책을 무한정 다시 들을 성격은 아니었다. 곧 내가 듣고 싶은 책은 다 동나버렸다. 오디오북에 중독(?)된 지 3개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인터넷 강의라도 틀어놓고 다니고 싶었다. 그냥 휴대폰 요금을 무제한으로 높이고, 그렇게 할까? 고민하던 시기에 알게 된 것이 있다. 바로 전자책 TTS 기능이다. Text to Speak, 그러니까 전자책 텍스트를 자동으로 읽어주는 기능이다. 전자책이나 한번 읽어볼까 하고 다운로드 받았는데, 아래쪽에 스피커 모양 탭이 있어 눌러 보니 책을 읽어주길래 알게 되었다.
신세계였다. 나는 전자책 도서관을 씨를 말릴 기세로 뒤졌다. 전자책 도서관에는 너무 많은 책이 있었다. 오디오북의 몇 배는 넘는 책들이 나를 기다렸고, 나는 신나게 책을 틀어 놓고 운전을 했다. 지금까지도 전자책은 나의 좋은 출퇴근길 친구다. 주말만 되면 다음 주에 무슨 책을 읽을지 고민하곤 한다. 욕심껏 책을 들여 놓다 다 듣지 못하고 자동으로 반납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내가 욕심을 내고 있다는 이 사실이 뿌듯하고 즐겁다. 기계음 섞인 목소리로 읽어주는 책 내용은 흥미롭고 재미있다.
내 친구에게 출퇴근길은 아이디어의 산물이다. 글의 주제를 고민하고, 얼개와 캐릭터 시트를 짜는 시간이다. 다른 친구에게 출퇴근길은 공부의 장이다. EBS와 함께 공부하고, 자신이 배운 것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함께 한다. 어느 친구에게 출퇴근길은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하는 리듬의 시간이다. 그 모든 출퇴근길에, 나의 시간이 합쳐진다.
나는 매일 책을 듣는다.
매일 열리는 책의 세계는 비어 있을까 두렵던 내 공간을 채우고, 내 삶을 채운다.
출퇴근이 더이상 두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