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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칼랫 May 20. 2021

누구나 꿈꿀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웹툰 '나빌레라', 200519 창작가무극 '나빌레라' (조형균/강인수)

2021년 5월 19일 수요일. 예술의 전당 CJ 토월극장에서 진행되는 창작가무극 '나빌레라'를 관람하고 왔다. 오랜만에 내 브런치 매거진인 '멀티앑가즘'에 자신 있게 감상문을 올릴 수 있는 멀티채널 작품이었다. 웹툰 원작으로 동명의 창작가무극(뮤지컬)과 드라마가 있는데, 웹툰과 뮤지컬을 함께 감상해보기로 했다.

나빌레라 포스터 앞에서 활짝

#1 - 전체 줄거리


76세의 치매 초기인 심덕출 할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가졌던 막연한 발레에 대한 동경을 구체화시켜가는 과정을 그렸다. 이를 도와주는 친구가 20대 청년인 채록이다. 재능은 있지만 열악한 가정형편을 극복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 방황하며 삐딱선을 타기도 한다. 재능이라는 것은 없을 때는 아쉽고 가지고 있을 때는 알량하다. 채록에게는 분명 재능이 있지만 그게 고난 면제의 프리패스가 되지는 않았다.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발레 연습에도 나올 수가 없었다. (왜 '재능있고 실력있는' 친구가 발레레슨을 하는 걸로 돈을 벌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는데, 아직 채록은 콩입상못해서 군면제도 못 받고 한예종 입학도 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학생을 찾기 어려웠던 게 아닐까 추론해봤다.)


#2 - 작품 감상

나빌레라 웹툰

나빌레라를 접했을 때 발레를 처음 배우겠다고 마음먹었던 26살 무렵이 생각이 났다. 웹툰을 보기 시작하면서 2화부터 마지막화까지 여러 번을 울었다. 삶을 책임지기 위해 꿈을 꿀 수 있는 여유 따위는 없던 할아버지를 보며 아팠던 어린날, '하고 싶은 것'을 고민해볼 여유 따위가 없던 내가 보였고, 채록과 할아버지를 보면서는 내게 발레가 어떤 의미인지 상기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래도 성인 취미 발레를 하는 사람이 조금 더 생겨났지만,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통통하고 팔다리도 안길고, 키도 작았던 나. 발레는 우아한 장르인데, 내가 보기에도 나는 그런 우아한 춤과는 물론 클래식과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덕출의 큰아들인 성산은 성실하고 좋은 아들이긴 하지만, 아버지가 발레를 한다는 것이 부끄러워 아들인 자신의 체면까지 깎일까 봐 처음에는 아버지의 발레를 반대한다. 발레를 하면서 보았던 여러 가지 편견 중 하나였다. 발레는 정적이라서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 같다거나, 마르고 유연하지 않으면 못한다거나 셋째가 쫄쫄이 입고하는 웃긴 춤이라는 그런 얘기들. 전혀 그렇지 않은데.


문경국 단장은 마음의 평화없이 예술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내가 발레를 시작한 이유는 단순히 운동을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현재 발레를 대하는 마음은 더 경건하다. 채록은 몸이 버텨내야 근육이 생기고 유연성이 는다고 말했다. 인생도 그렇다. 제 풀에 화가나는 날이나 마구 늘어지고 싶은 때에 발레를 떠올리며 마음의 중심을 다잡는다.


코어근육을 키우고, 폴드브라를 연습해 앙쉐느망을 다듬는 과정처럼 마음에도 코어근육을 단련하고, 스스로의 원칙을 지킨다는 풀업을 하며, 융통성이라는 유연함과 폴드브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해서 나만의 앙쉐느망을 연습하고, 삶이라는 작품을 만들어간다. 녹록치 않은 삶을, 풀업해서 버텨내고 나면 내 마음도 더 단단해지고 유연해져있다. 아름다움은 거기서 생겨난다.


#3 - 뮤지컬과 웹툰 비교감상

커튼콜 장면

'발레'라는 소재는 어려운 소재라고 생각한다. 짧은시간에 완성시키기 어려운 장르다. 그래서 프로들의 무대에 발레가 올라와야한다면, 배우들이 몇달정도 배워서 완벽하게 춤을 춰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기에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의 난이도도 높다고 생각한다. 연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노래만 부르는 것도 아니다. 연기하며 노래를 불러야하는데, 거기 들어가는 춤이 '발레'라면 고난도 종목들끼리 콜라보를 해서 더 높은 고난도가 된다. 발레, 노래, 연기 삼박자가 모두 탑급이면 당연히 너무나 볼 만하겠지만, 저 중 하나라도 삐끗하면 세 가지 요소를 그냥 적당히 버무려놓은 정도밖에 되지 못한다. 나빌레라가 '뮤지컬'이 아니라 '창작가무극'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운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뮤지컬이라고 부르기엔 음악보다 무용의 비중이 높고, 그렇다고 무용극이라고 하기에는 대사도 많고 노래도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여기, 인기가 많았던 웰메이드 웹툰의 내용까지 제대로 살려야했다. 웹툰은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을 다루며 인물들의 상황과 관계를 깊이 있게 보여줬었다. 이런 작품을 무대공연으로 올릴 경우 2-3시간으로 압축을 해야한다. 나빌레라라는 작품의 아이덴티티가 정확하게 파악되어야만, 제한된 시간동안 상황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고 캐릭터의 입체감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이 '창작가무극'은 여러모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도전적인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원작이었던 웹툰에서부터 할아버지의 설정이 말도 안되긴 했다. 집안 청소도 잘하고 아내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70대 할아버지라는 것 부터 상당히 꿈같은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발레에 대한 동경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동년배 대비 몸도 좋으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공연에서도 젊은 배우가 노인 분장을 하고 덕출역을 맡았다. 그래서 '내가 레오타드 한 번 입어봤는데,'라시며 웃통을 벗는데, 으어, 노인분이 몸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다. 3층에서 봤는데도 눈에 띄는 이두와 등빨이란. 반면 채록이는 발레리노라고 하기엔 마른느낌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진짜 발레리노의 몸보다는 피지컬 좋은 뮤지컬 배우의 체형을 훨씬 좋아하는데, 보통 발레리노는 선명한 데피니션보다는 길고 섬세한 선을 자랑한다(ㅠㅠ)


웹툰안에서는 채록이와 할아버지가 가까워질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여러모로 묘사가 되어있는데, 뮤지컬은 그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삐딱선을 타던 채록이가 할아버지와 연습을 몇 달 하다보니 알아서 성실해진 것 같은 느낌이 좀 들었다. 여기 그 '몇 달간의 연습'에 대한 시간 흐름도 대사 몇개로 뭉뚱그려졌다고 생각한다. (연습실에서 연습하던 동료 친구가, '할아버지, 6월인데 에어콘 안틀어요?', '7월인데 에어콘 안틀어요?' ~ '9월인데 왜 에어콘을 트셨어요~' 라고 말하는 대사 몇번으로 3개월의 시간이 흘러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채록의 캐릭터는 조금 단조로운 느낌이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덕출에게 더 마음이 갔었다.


이 공연의 채록은 실제 무용을 전공했던 배우였다. 어려운 상황에서 채록이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장면에 채록의 솔로안무가 나오는데, 현대무용 같은 움직임이었다. 이 장면에서 채록이 춤추는 게 손끝까지 섬세해서 주의깊게 감상했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건, 극 엔딩, 채록은 러시아발레단에서 활동하다 국립발레단 수석으로 돌아오는 설정인데, 발레만 놓고보면 채록은 그런 실력으로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이건 정말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그걸 실제로 보여주려면 진짜 국립발레단에서 배우를 캐스팅해와야했을테니까! 그냥 내가 국립발레단, 유니버설 발레단 발레를 자주 보다 보니 눈만 높아진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빌레라 시작전, 무대 구성

무대장치와 조명과 소품에도 재밌는 부분이 많았다. 무대는 기본적으로 회색 건물들의 배치로 구성되어있었다. 회색배경의 건물들은 평범한 인물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도시를 보여주면서도 덕출의 치매가 진행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했다. 극이 진행되면서 이 건물들이 움직여 다양한 구도를 만들어내고, 건물 외벽에 영상을 쏴서 여러 화면으로 전환하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조명의 경우 덕출의 치매가 진행되는 순간 보랏빛 조명과 흔들리는 조명/사운드를 활용했다. 그래서 보랏빛 조명이 나올 때는 나도 같이 울컥하고 '아 어떻게 하면 좋아'같은 감정이 일었다. 계속 가슴이 철렁했다. 덕출의 집안에는 벽 왼편에 가족들과 함께 한 순간들의 사진이 여러장 걸려있다. 서로 사이가 좋은 가족들의 모습과, 덕출의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을 보여주는 소품이라고 생각했다.오른편에는 장식장이 있는데, 그 장식장 안에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형인 마뜨료쉬까와 작은 발레피규어세트가 놓여있다. 이 장식장을 보면서는 덕출의 꿈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에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발레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는 소품이었다.


웹툰에 있던 일본인 단원 키요시와 의대생 겸 발레리노(... 말도 안돼..) 정환은 뮤지컬에서는 사라졌지만, '키요시, 그렇게하면 안되지!'라거나, '정환이가 해'라는 문경국 단장의 대사에 언급되더라. 문경국 발레단의 주치의였던 정환이 아버지 캐릭터를 좋아했던 나는 정환이가 생략된 것이 아쉽지만, 빠른 흐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덕출의 손녀인 혜진이는 웹툰 상 대기업에 취직한 걸크러쉬 쿨시크 캐릭터인데, 뮤지컬에서는 귀엽고 상냥한 손녀딸의 느낌이었다. 애초에 비중이 적었는데, 웹툰 상으로는 채록이의 여자친구가 되는 꽤 커다란 인물이다.


창작가무극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무대  앞편에서는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뒷편을 활용해서 군무가 많이 나온다. 유회웅 안무가가 안무를 짰다는데 여러상황에서 발레안무들이 많이 나와서, 발레팬인 나로서는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덕출과 채록이 공연을 한다. 발레전공이었던 채록이야 뭐 가볍게 췄을 것 같은데, 이 공연을 하느라 발레를 배웠다는 덕출은 실제로 끙끙대며 춤을 췄을지, 아니면 노인처럼 추는 연기를 한 걸지가 궁금했다. 실제로 발레를 배우게 되면 몇달이 지나도 그럴듯하게 흉내내는 것 조차 힘든데, 그걸 그저 '젊은 사람이 발레 시작한지 얼마안돼서 미숙한것'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 몇달 어느정도 배운 노인이 잘 못하는 느낌'은 다를 것 같다. 전자는 남이 하는 걸 관찰해서 흉내를 낼 수도 있을 것 같긴한데, 후자는 샘플이 없어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초반부에 채록이가 덕출에게 파세를 시키는데, 그 파세가 '노인으로서' 잘 안되는 모습을 표현한 장면이 인상깊었다. 과장이 많이 들어가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발레를 처음배우는 노인이 파세를 하면 그렇게 흔들리는게 아니라 다리자체를 들지 못할 것 같다. 그렇게 흔들리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을텐데, 발레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거기 '노인처럼 못하는' 연기를 하려면 더 어려웠을 것 같다.

웹툰에서는 사이드로 들어올리는 걸 시켰는데, 공연에서는 파쎄였던 걸로 기억한다.

웹툰이 더 감동적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웹툰에서 가슴에 내리꽂히는 대사들이 상당히 많이 그대로 차용되어 뮤지컬 대사가 되었더다. 웹툰 원작의 창작물을 처음 봤기 때문에 웹툰의 대사가 실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게 되는 걸 본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만화 캐릭터가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사람들이 감정을 넣어 현실에 있는 것 같이 만들어주어서 '아 정말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구나'라며 더 공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4 - 발레팬으로서 본 나빌레라의 캐릭터들

나빌레라의 포토월

발레팬이라면 나빌레라 캐릭터들의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들을 몇몇 눈치챌 수 있는데, 문경국은 대한민국 발레의 전설 중 하나인 이원국 발레리노(실제로 웹툰의 하단부를 보면 자문을 해주셨다고 명기되어있다), 잠깐 나오는 국립발레단의 단장님은 현 국립발레단의 단장이자 독일 슈트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무용수였던 강수진 단장이었다.


웹툰상 러시아에서 활동하다 국립으로 돌아온 문경국 단장의 제자가 있는데(이름은 기억이 안난다..) 이 캐릭터를 보면서는 김기민 발레리노가 생각났다. 러시아에 진출했던 무용수는 현 유니버설 발레단의 단장인 문훈숙 단장, 그리고 동 발레단의 유지연 예술감독 등 몇몇을 알고있기는 한데, 남자무용수는 알고있는 사람이 많지가 않아서 바로 떠오른 사람은 김기민 발레리노였다.


웹툰에서 할아버지가 국립발레단의 혜진단장과 문경국 단장의 친구인 러시아 무용수를 보며 사인 받고 사진찍어도 되냐고 두근대는 모습에서도 내가 보였다. 마타하리 공연이 끝나고 출연자출입구에서 강수진 단장을 보고 토슈즈를 내밀며 사인을 부탁한 적이 있다. 흔쾌히 사인을 해주셨고, 그 토슈즈는 아직도 우리집에 있다(ㅠㅠ) 2019년도 유니버설 발레단 춘향에 쉬클리아로프라는 러시아 발레리노(... 하 제가 실제로 본 살아있는 크리쳐 중 가장 아름다웠습니다)에게 운좋게 사인을 받았던 (제가 유발 서포터즈였습니다... 뿌듯) 경험이 떠올랐다. 프로가 될 수 없고 한계를 이미 알고 있음에도 '이쇼라스(한번더)'에 포기 않고 연습하는 모습에서도 내가 보였다. 덕출처럼 남은 생을 걸고 하는 그런 대단한 이쇼라스는 아니었지만.


#5 - 마무리

나빌레라 뮤지컬 포스터

할아버지가 발레를 배우러 우리 학원에 온다면 나만해도 처음엔 발레무시하나 싶은 생각이 들 것 같다. (음흉한 할아버지일거 같고..?) 나도 발레 잘하는 거 아닌 주제에 또 괜히 발레를 해본적도 없으면서 토슈즈에 로망만 가지고 그걸 소품으로 찍으려는 사람들만 봐도 속에서 울컥할 때도 있다. (발레의 특별함을 잘 알지도 못하는 아무나가 훔쳐간다는 기분이 들곤 한다..ㅠ) 그런데 또 전공생들 눈에는 내가 '니까짓게 발레한다는거 자체가 발레를 무시하는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예술에는 경계가 없는데, 사람들이 경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가 발레를 하든, 격투기 선수가 꽃꽂이를 하든, 예술을 편가르는 태도는, 나도 잘 못 고치는 거지만, 덕출의 큰아들이었던 성산이 발레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체면 깎인다'며 부끄러워했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큰 무대에서 대단한 테크닉을 자랑하거나, 모두가 감동할 만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에게 '아티스트, 예술가'라는 칭호를 붙인다. 하지만 치열한 삶 속에서 꿈을 피워낸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가 예술가다. 채록이 그랬고, 덕출이 그랬던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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