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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칼랫 May 23. 2021

허난설헌이 남긴 유산에 대한 보답

21.05.23'감우/몽유광상산'과국립발레단의 '허난설헌-수월경화'

2021년 5월 23일 일요일. 오늘은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이었다. 22일 토요일부터 오늘까지 이틀간 국립발레단에서 3회 차의 '허난설헌' 공연이 있었고,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은 두 분이 알아서 하시겠지 싶어 나는 23일의 막공을 택했다.


- 글의 목차 -


#1. 작품소개

#2. 무용감상

#3. 안무가

#4. 스토리감상

#5. 뒷이야기

2021 허난설헌 주역 캐스팅


#1. 작품 소개


우선, 허난설헌은 아래 허난설헌의 시 '감우'와 '몽유 광상산'을 무용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수월경화'는 '물에 비친 달, 거울에 비친 꽃'이라는 뜻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실제로 잡을 수 없는 달과 꽃을 의미한다. 작품을 보고 느끼는 바에 의하면, '원하고 꿈꾸는 것이지만,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환상'이라고 해석해도 될 것 같다.

1. 감우(感遇, 느낀 대로 노래한다)

盈盈窓下蘭(영영창하란)

枝葉何芬芬(지엽하분분)

西風一被拂(서풍일피불)

零落悲秋霜(영락비추상)

秀色縱凋悴(수색종조췌)

淸香終不死(청향종불사)

感物傷我心(감물상아심)

涕淚沾衣袂(체루첨의몌)


2. 몽유광상산 (夢遊廣桑山, 꿈 속 광상산에서 노닐다)

碧海浸瑤海 (벽해침요해)

靑鸞倚彩鸞 (청란의채란)

芙蓉三九朶 (부용삼구타)

紅墮月霜寒 (홍타월상한)


이 때문에 아래의 전체캐스팅을 보면, 위 시에서 나오는 '잎, 난새, 바다, 부용꽃' 등 자연물 배역이 많다. 이번에 뀨난새를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어찌저찌 23일 낮 공연에 김명규리노가 푸른난새 캐스팅으로 변경되어 볼 수 있었다.

2021 허난설헌 전체 캐스팅 확정 본


내가 소개하는 내용 외에도, 위의 프로그램북 PDF에 작품해석을 비롯하여 조명, 의상, 무대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자세히 실려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지난번 라 바야데르 때부터 국립발레단 측에서 프로그램북을 미리 오픈해줘서 공부를 해보고 공연을 보러 갈 수 있었다. (현장에서는 3천원에 판매를 했는데, E-book은 따로 과금하지 않았다.)


#2. 무용감상


운 좋게 맨 앞자리 1열을 획득해서, 굉장히 가까이에서 무용수들의 표정은 물론 숨소리까지 들으며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초반에 먹을 형상화해서, 화선지(무대)에 몸으로 붓글씨를 써내려가는 움직임이 나타나는데, 이들이 다 웃고 있다. 허난설헌이 글을 쓸 때 행복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나는 신승원 수석을 좋아한다. 슬기수석도 좋지만 승원수석에게는 개성과 카리스마가 있다. 클래식 발레에서는 '강단있는' 여주인공이나, '고뇌하는' 여주인공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공주님이나, 사랑에 슬퍼하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있을 뿐. 승원수석은 본인의 그 개성 때문에 클래식한 발레의 주역보다는 오늘의 허난설헌 같은 역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솔직히 말하면 당사자는 이 이유로 고민할 것 같긴하지만, 승원수석을 다른 무용수보다 훨씬 좋아하는 건 이 때문이다.


궁금했던 뀨난새는 사실 좀 감동이었다. 명규리노가 재주꾼 끼쟁이 캐릭터를 자주 맞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잘 하는 사람인지 이번에 제대로 처음 알았다. 뀨난새를 비롯해서 남자무용수들이 치마를 입고 많이 나오는데, 이질적이지 않고 아름다웠다. 남자 무용수들은 대체로 웃통을 벗은 채로 치마나,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이상하다고 느끼지조차 못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이실직고하는데... 몇몇 분들 몸이 너무 좋아서 군무에 집중이 안될 정도였다 (...) 기억합니다... 이유홍 곽동현 변성완,,, (끙)


나무와, 잎, 바다는 따로 설명이 없어도 의상을 보면서 뭔지 알겠더라. 그 중에서도 바다가 맘에 들었다. 야구장의 파도타기처럼 순서대로 움직임의 높낮이를 조절하는데, 푸른 의상까지 잘 어울려서, 정말 흰 포말이 쓸려오는 파도같아보였다. 보는 내내 '오, 저렇게 표현해서 사람을 파도처럼 움직이게 할 수 있구나'라는 감탄을 자아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주역이었던 '시인의 이상'을 연기했던 기완수석. 시인의 '이상'이지만, 그 이상이 시인을 붙잡기도 하고 비탄에 빠지게도 하고 움직이지 못하게도 한다. '이상'이 아니라 '이성'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난번 승원수석의 창작안무이자, 기완수석과 정은영리나가 연기했던 'Go your own way'도 생각났는데 그때 앞길을 가려던 자아인 은영리나를 막아서는 기완수석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 공연이 끝나고 출연자출입구에서 승원수석을 만나 사진을 함께 찍었을 때, '정말로 생각이 많으신 것 같아요'라고 말씀드렸는데 (평온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다.) 그 때 승원수석은 웃으며 '모두들 그렇게 말하시네요!'라고 대답했다.


승원수석은 단연 최고였다. 지금까지 클래식 발레에서 봐온 승원수석은 폴드브라를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 팔이 짧은 것도 아닌데 등줄기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하나하나 신경쓰는게 다 보인다. 거기에 표정도 세심하게 기획해서 연기하는 느낌인데, 허난설헌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에 부용꽃이 지는 장면에서 슬퍼하는 그 표정을 보며 나도 함께 울었다. 시들어가는 자유와 꿈, 그리고 스스로의 생명까지, 잡히지 않는 것을 잡고 싶어하는 애달픈 그 표정이란.


전체적으로 푸른난새, 채색난새, 바다, 잎, 가지 등의 색깔과, 허난설헌의 녹색 의상, '시인의 이상'의 흰색 의상이 무대를 물들여서 시각적으로도 즐거웠다. 시를 형상화 하기도 했지만 허난설헌의 삶에 대한 스토리도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스토리 부분을 좀 더 살려서 전막을 만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3. 안무가

강효형 안무가(이자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허난설헌의 안무가는 현재 국립발레단의 무용수로 활약중인 강효형 발레리나인데, '호이랑'과 '요동치다'의 안무를 총괄한 무용수다. 여자가 남장을 하고 군에 입대하는 호이랑이나, 여자무용수들만을 데려다 역동성을 표현해내는 걸 보면서 여성의 Capacity에 관심을 갖고 있는 안무가(이자 무용수)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실제로 호이랑의 안무는 여자주역에게 굉장히 힘든 안무인데 효형안무가는 그걸 구성해냈고, 주역은 그걸 해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여자도 밀리지 않아'라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요동치다'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역동성'을 표현할 때에 주로 남자무용수를 활용하는데, 그 구성을 전부 여자들이 했다. '여자가 유연하기만 한게 아니야. 역동적일 수도 있어!'라는 주장을 말이 아닌 몸으로 하고, 그 작품을 통해 용기를 느끼게 한다. '허난설헌'이라는 주제 또한 '강효형 안무가이기 때문에' 라고 생각했다.


호이랑도, 요동치다도 마찬가지였지만 허난설헌도 여러모로 도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국악이라는 것도 색달랐다. 한국적 정서를 섞은 발레공연은 유니버설발레단의 심청, 춘향을 비롯해 앞서 말한 국립발레단의 호이랑도 있다. 동양적인 사운드가 나오긴하지만 그래도 클래식음악이 기반이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허난설헌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야금, 거문고를 가지고 극을 전개한다. 피아노, 바이올린은 아예 존재하지 조차 않는다. 처음 자리에 앉아 오케스트라(국악도 오케스트라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의 자리를 보았을 때, 모두 거문고, 가야금, 장구 같은 국악기라 깜짝 놀랐다. 거기에 아까 잠시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의 남성들이 치마를 입고나오는 것도 신기했다. 창작작품에서 남자무용수들이 풀치마를 입고 나오는 경우를 꽤 보긴 했지만 허난설헌 공연을 보면서 '허난설헌이 여자라는 걸 제외하면, 애초에 남녀 구별이 없는거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4. 스토리 감상


인물 허난설헌에 대한 해석으로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적인 비운의 여인'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듯하다. 공연을 보고나서 든 생각은 아니고, 프로그램북을 보면서 느낀건데, 어쩌면 그녀는 '천재적인' 여자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좋은가문에서 태어났고, 그녀의 형제들이 다 학문적으로 성공한 걸 보면 허난설헌도 재능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허난설헌의 집안은 여자인 난설헌에게도 기회를 줄만큼 개방적인 집안이었다. 그녀의 형제들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는 것은, 그 형제들도 사실은 다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개방적인 집안의 어른에게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개인의 재능과 교육의 콜라보레이션이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단순히 그들이 '천재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고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허난설헌은 천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녀의 관심사를 드러냈고, 그 관심사에 투자를 할만한 부모와 가족의 지원이 있었던거다. 그 당시의 여자들이 그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허난설헌 보다 더 대단한 여자가 많았을지 모른다. 다만, 허난설헌은 '여자에게 그런 지원을 하지 않는 사회에서 태어난 운나쁜 여자'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심양면 지원을 해주었던 드문 가족을 만났던 운좋은 여자'였던걸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런 지원을 받고자란 것이 난설헌에게 실제로 운이 좋은건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나 또한 부모님으로 부터 '하고싶지 않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라거나, '궁금한 것은 주저말고 물어봐'라는 교육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말은 하고 하기 싫은 말은 안하는 어른이 됐고, 이거 때문에 피곤한 사람으로 보일 때도 있다. 종종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뜨악할만한 발언을 하기도 하고 '모난 돌' 처럼 보이거나 '안지는 사람', 혹은 '싹퉁머리 없는 어린여자애' 정도로 생각되기도 한다. 내가 이런 소리를 듣고 와서 고민할 때마다 엄마는 가끔 '나는 네가 눈치보지 않는 어른이 되길 바라고 키웠는데 내가 너를 잘못키운걸까? '라고 하셨다. (나는 여기 늘 '아냐 엄마, 나도 엄마처럼 아이를 키울거야'라고 말한다.)


우리 가풍은 그렇다. '내가 있어야 너도 있다. 모든 상황에서는 나 스스로가 우선이다.' 엄마에게는 나보다 엄마가 우선한다. 그리고 내가 나를 우선시하거든 엄마는 섭섭해하지 않는다. 아빠도 그렇다. 부모님이 나를 위해 해주는 모든 것은, 부모님이 사랑하는 내가 행복해지면 부모님에게 좋은 일이기 때문이지, 스스로를 희생해서 나에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 집안에서 '이기적이다'라고 평가하는 행동은, '자기맘대로 남에게 잘해주고는 나는 배려를 했는데 상대는 배려가 없다며 불만토로하기' 혹은 '남 눈치보느라 자기 주관 제대로 말 안한채로 일이 흘러가게 내버려두고서는 나중에 결국 자기 맘대로 안되어버렸다며 뒤에서 원망하기' 따위의 일들이다. 다른집안에서는 부모님이 이렇게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걸, 나는 지금 이 나이가 되고서야 얼마전에 깨달았다.


하지만 내게 '그래서 남들 교육받는대로 교육 받았으면 좀 나았을거 같아?'라고 묻는다면, 내 답은 '아니야, 나는 이게 훨씬낫다고 생각해'다. 그냥 남들 배우는 대로 '남부터 생각해'라든가 '니 주장 너무 내세우지 마'같은 걸 배우고 자랐다면 좀 더 회사에서 유들유들하게 인간관계를 맺었을지도 모르고, 진즉 시집을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사회적인 관계를 유지하는데에 있어서는 좀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그렇게 되면 내가 '나와의 관계'는 지금처럼 건강하게 유지하기 어려웠을거라고 생각한다.

매트릭스의 빨간약과 파란약 이야기가 떠오른다.

근데 사실 내가 지금 말한 건 진실과 거짓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빨간약 파란약 이야기는 훼이크다. (ㅋㅋ) 내가 지금 말한 건 '해석'에 대한 문제다. '우리 딸아이의 학문의 자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을 허씨집안은 '학문의 자유에는 성별이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풀어냈던 것 뿐.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게 공부할 수 있어야해요'가 '진실'이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그 해석이 그 시대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었던거다. 진실과 거짓이 싸울 때가 아니라, 해석이 충돌할 때 갈등이 생겨난다. 왜 여기서 '진실'과 '거짓'이라는 개념을 피하냐하면, 그렇게 정의를 내릴 경우 '선'과 '악'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선과 악으로 편을 가르기 시작하면 그 땐 정말 갈등을 해결할 수가 없게된다. 혁명을 일으켜서 세상을 뒤집어 엎을게 아니라면 개인적으로는 그 편가르기를 좀 피하고 싶다.


편가르기를 피하고 싶은 이유는 간단하다. 허난설헌 작품을 보면서 내가 떠올린 건 나빌레라의 채록이었다. 채록이는 남자다. 걔는 2010년대에 나타난 캐릭터인데 궁핍하다. 궁핍해서 재능있는 춤도 그만둘 판이다. 사상적으로 억압도 받는다. 축구선수출신이던 성철이가 엄청 무시를 하기도 하고, 발레라는 장르 자체가 무시를 당하기도 한다. 채록이의 이야기는 단지 만화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변에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꿈을 꿀 여유조차 없다는 것. 난설헌의 장애물은 사회적 장애물이었다. 채록의 장애물은 상황적 장애물이었던거고. 앞선 글에서도 여러번 언급했지만 나도 꿈꿀 자유가 없던 시절이 있다. 몸이 성치 않아 눈앞에 당장 있는거라도 허버허버 해야했다. 나도 상황적 장애물이 있었다. 이런 장애물이 없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궁핍함과 신체적 부자유에 '악'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으니까. 극복해나가야 할 벽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정의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진실과 거짓'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지는 않다. 허난설헌의 이야기는 '자유를 억압당한 비련의 여자'가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안되는 세상을 살아가느라 좌절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허난설헌을 보고 여자만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까의 질문에 대한 답. 남들 교육받는대로 교육 받지 않았기(..모.. 못한건가??ㅋㅋ) 때문에 나는 해석의 자유를 얻었다. 집안 분위기를 따르는 해석을 할 수 있고, 사회를 살아가며 배운 사회적 해석을 할 수도 있다. (물론, 내게는 우리 집안식 해석이 훨씬 더 직관적이고 빠르고 편하다. ㅋㅋ) 삶은 복잡하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감수성도 필요하다. 피해자나 약자를 돕기 위해서는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한다. 그리고, 모두들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가해자와 강자의 입장을 살펴봐야 문제의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다. 그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이전에 이런일이 왜 벌어졌는지를 알기 위해서 알아야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해석을 할 줄 아는 능력은 상당히 도움이 된다. 예전 직장에서 회계사가 됐든 막내말단직원이 됐든  여자직원이라면 무시하던 남자상사가 있었다. 그는 내 앞에서 나를 상대로 자기 휴대폰을 던지며 위력을 과시하려들었는데, 나는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데 자기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나에 대한 질투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질투의 마음을 깨달은 뒤부터 이 모자란 자가 안타깝게 느껴져버려서 마음이 좀 아프긴 했지만, 그러한 '해석의 능력'은 나를 그 사람에 대한 공포에서 좀 더 자유롭게 했다.


부용꽃 스물일곱송이가 시들어버리며 허난설헌도 스물일곱의 나이로 생을 마치지만, 그녀의 죽음은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여자의 사회진출이 막혔던 당시부터 시간이 흐르며 허난설헌 같은 여자들이 등장했을거다. 그들은 사회적인 장애물로 인해 동시대의 남성인물만큼 재능을 떨치지는 못했을테지만, 여자인 내가 여기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춤을 추고 공연을 보는 것 또한 그녀 덕분이다. 부용꽃 스물일곱송이와 함께 져버렸던 허난설헌이 없었더라면 나는 집에서 맨날 설거지하고 빨래나 개는, 글도 못읽고 춤도 추지 않는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이름도 '막딸이' 뭐 이런거였을수도. 그렇게 살았으면 혐오스러운 회사생활도 안했을테고 복잡한 생각없이 삶을 좀 더 편하게(?) 살 수는 있었겠지만, 과연?


그랬다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좋은 것이 많고 삶이 선물같은지는 몰랐을거다. 처음부터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알게 된 이상, 나는 이 길이 더 행복하다. 그래서 어떤 것이 되었든 더 많이 보고 싶고 더 많이 알고 싶다. 그것이, 허난설헌이 부용꽃과 함께 져버리며 내게 남겨준 유산에 대한 보답이자 의리일테니까.


#5 - 뒷 이야기

2021 허난설헌 포토월

1. 오늘 인스타로만 연락하던 발레팬 지인들을 만나서 인사를 나눴다. 원래 아는 지인들도 만났고! 지인의 지인과도 인사했다. 과거 공연장에서 사교와 친목을 도모했다는데 이럴때마다 어떻게 공연장에서 사교와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됨.


2. 그렇게 만난 지인들과 선물도 받고 셀카도 찍었는데 완전 신났다. '왜이렇게 얼굴이 작으세요~~~'라고 해주셔서 또 약간 어깨 으쓱했음.


3. 지난번 라바야데르 때 폭우가 쏟아졌었고, 우산없던 나는 성완리노(위에서 말했던 그 몸좋다는 변성완씨.. 네 맞습니다..) 덕분에 영재리노 차를 얻어탔었다. 오늘 고마워서 도넛 드리고 왔다ㅎㅎ 

- ???: 차는 영재형이 태워줬지만 간식은 제가 먹을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4. 캐스팅 보니까 '부용꽃'이길래 빨간색 딸기잼이 들어간 도넛을 사갖고 갈랬는데 (-_-... 컨셉미치광이 정체성 못잃어..) 충무로역 던킨도넛에 스트로베리 필드 웨 없어!!!!ㅠㅠ (이걸 줄줄 성완리노한테 말까지함.. 부용꽃이라.. 딸기잼 도넛을 사고 싶었는데... 구구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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