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공을 버리기로 하였다.
20여 년 전 한창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토마토'에서는 김희선이 당찬 구두 디자이너로 나온다.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최근에 종영된 '지헤중'에서도 송혜교가 능력 있고 멋진 디자이너로 나온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독 패션 관련 디자이너들은 세련되고 멋지고 당차며, 능력 있고 업무 스타일 또한 상당히 미화되어 보인다.
물론 내가 현직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므로 백 프로 사실에 대해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창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서 온전히 몰두했던 대학생 시절 인턴(수습사원)으로 경험한 실상(?)과 결국 아무런 빽이 없던 내가 디자이너로서의 모든 꿈을 접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나는 학과 공부를 열심히 했기에 늘 자신감도 가득 차 있었고, 비록 현실에서 아무런 빽이 없었지만 전혀 그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세상 물정을 몰랐다.)
줄줄이 의류기업들이 폐업을 하고 부도가 나도 내가 갈 수 있는 대기업이 분명 있을 거라 의심치 않았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20여 년 전에는 중소기업의 경우 디자이너의 월급이 대략 60만 원 전후의 초박봉이었으며, 늘 수당 없는 초과근무와 밤샘근무를 하는 복지 사각지대의 직업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이름만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렇다고 몇 년을 고생하며 다니던 사람들도 결국엔 다 회사를 관두는 식이었으니 그래도 힘든 업무를 꾸준히 하려면 훨씬 인정받는 대기업에 취업해서 배우는 게 맞다고 생각하였다.
간혹 졸업 후 옷가게를 창업하거나 샵마스터라는 자격증을 취득한 후 백화점에 취업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관두었다. 그만큼 취업시장은 얼어붙어 있었고 불경기가 계속되었다.
4학년이 되었을 때 교수님이 추천해주신 좋은 기회로 모 대기업에 수습사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학과 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리숙한 학생이었지만 실무를 배울 수 있어서 너무 들뜨고 즐거웠다.
게다가 내가 입사하고 싶었던 대기업을 미리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다니...!
그렇지만 그러한 기쁨도 잠시.
현실은 나의 생각과 너무나도 달랐다.
내가 간 대기업의 디자인 부서에는 디자이너가 다섯 명이 있었다. 3번째 디자이너가 우리를 불러 첫째 디자이너에게 인사시켰다. 그녀는 높은 위치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편하게 잘 배우다 가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둘째 디자이너는 간단히 목례만 하고 지나쳐갔다. (그 이후에도 전혀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
3번째 디자이너는 4번째, 5번째(막내) 디자이너를 호출하여 각각 어떤 부분에서 우리를 교육시키라고 지시하였다.
그렇게 나와 다른 친구 한 명은 두세 명의 디자이너들이 내리는 서로 다른 지시를 이행하느라 허둥지둥거렸다.
어느 날 3번째 디자이너가 시킨 이미지 콜라주 작업을 위해 우리는 책상에 앉아 다양한 잡지를 둘러보며 자료를 찾고 자르는 중이었다. (사실 우리의 그러한 일들이 전문가인 그들에게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으리라...)
그러다 막내 디자이너가 와서 하던 것은 그냥 멈추고 창고 청소를 하라고 하였다. 창고라고 지칭하기에도 애매한 매우 거대한 물류창고 안에는 수만 가지의 옷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곳을 대충 알려준 대로 정리한 후 돌아오니 탕비실로 들어가서 커피를 타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물쭈물 커피를 타러 가는 우리들을 첫 번째 디자이너가 불러서 "너희들은 커피 안타도 돼. 가서 배우던 거 마저 배워."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포지션마다 다른 지시사항에 곤란하였지만 제일 높은 디자이너의 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책상으로 다시 돌아가서 어설픈 서류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때 4번째 디자이너가 와서 우리를 휴게실로 따라오라고 하더니 벽으로 둘 다 세워 날카롭게 말했다.
"너희들 드라마만 보고 뭔가 디자이너에 대해 착각한 것 같네. 신입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한다고 생각하니? 내 말 잘 들어! 회사에 입사하면 처음 3년간은 커피만 잘 타면 돼. 그리고 창고 청소 열심히 하고. 다른 것은 할 생각도 하지 마. 5년 동안 너희 같은 신입에게는 디자인 업무는 전혀 안 주어질 테니까."
마치 본인의 억울함(?)을 우리에게 호소하듯 아니면 진짜 혹시 선배로서 조언(?)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날 나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물론 드라마에서처럼 정말 미화된 삶을 상상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5년 동안 이렇게 구석에 호출돼서 멸시(?)를 당할 생각을 하니 서럽기도 하였다.
그렇게 그다지 좋지 않았던 수습사원 기간이 끝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대기업 입사 준비를 하였다.
그 당시 가세가 점점 기울었기에 나는 하루빨리 제대로 된 취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열심히 이력서와 자소서를 보냈고 드디어 어느 날 내가 수습사원으로 간 회사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대기업에서 면접 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20여 년 전 패션 디자이너 입사의 경우 영어시험이나 자격증은 특별히 중요하지 않았기에(물론 44~55 사이즈 이하의 몸매로 하루 종일 선배 디자이너가 제시하는 옷을 입을 수 있는 날씬한 몸매는 플러스 요인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가 내세울 수 있었던 건 우수했던 학과성적과 자신감뿐이었다.
(물론 지난 글에서도 썼듯이 회사 내 빽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지만 나는 없었다.)
면접을 보러 회사에 들어서자 경쟁자가 수십 명 아니 백명도 넘어 보였다. 5명 정도씩 호출되었는데 나는 꽤 뒷 순서에 불려서 기다리는 동안 너무 긴장되며 떨렸고 한편으로는 지치기도 하였다.
드디어 면접장에 들어선 순간 우리보다 더 많은 수의 면접관들이 앉아 있었고 떨리는 마음으로 내 자리에 착석하였다.
너무 오래전이라 세세한 것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꽤 자신감 있게 질문에 대답을 잘했다는 것
그리고 끝나기 거의 전까지 분위기가 좋았다는 것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러나...
퇴실하기 몇 분 전, 마지막으로 한 마디씩 하라고 할 때 다들 조용하자 한 면접관이 굳이 손을 들어 내 이름을 호명하였다. 그리고는 물었다.
"OO 씨. 포토샵이나 일러스트 프로그램은 혹시 다루실 줄 아나요?"
아뿔싸. 내가 제일 우려했던 질문이 나왔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왜 굳이 나만 콕 집어서 질문하지? 차례대로 질문했으면 답변이라도 생각해 둘 텐데...'
그때 면접에 관한 조언이 적힌 책에서 본 '어설픈 거짓말은 하지 마라. 솔직한 답변이 더욱 플러스가 된다.'는 문구가 떠올랐다.
"네, 저는 못합니다!"
.....
싸했다. 직감적으로 내가 잘못 대답했다는 것을 느꼈다.
자격증이 필수도 아니었고, 그 당시 의상학과 졸업생 중에는 그래픽 프로그램을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무조건 솔직하기만 한 답변이 아니라 솔직하지만 현명하게 대답했어야 했다.
"지금은 조금 미숙하지만, 계속 배우는 중입니다. 반드시 입사 전까지 완벽하게 숙지해오도록 하겠습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마지막 답변으로 자신감 넘쳤던 그동안의 나의 대답들은 다 물거품이 되었다. 예상대로 불합격이었다.
그 이후 몇 안 되는 대기업 서류조차 계속 불합격하자 디자이너의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차츰 강해졌다. 마치 세상이 나를 그렇게 밀어내는 기분이었다. 이것은 너의 운명이 아니야라고...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자 수습사원 때 들었던 말들이 뇌리를 맴돌며 나를 괴롭혔다.
'그래, 나는 디자이너랑 안 맞아. 나는 디자인을 하고 싶지 5년 동안 무시당하며 커피랑 심부름, 잡일을 하려고 공부한 게 아니잖아. 빨리 돈도 벌어야 하고.'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반복하였다.
나는 잘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보았다. 왠지 이 세계에서 거부된 것만 같은 반감 때문에 전혀 다른 분야를 찾았는데 어릴 때부터 내가 늘 자신 있고 좋아했던 과목이 미술과 수학이었기에 그렇게 나는 수학강사 생활을 하며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디자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살았다.
물론 워낙 좋아했던 분야였기에 꾸준히 미술관과 디자인 전시회를 자주 챙겨 보기는 하였지만 온전히 취미생활일 뿐이었다.
결국엔 다시 디자인 분야로 돌아왔지만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마도 20대에 느꼈던 불안한 감정을 확신으로 바꾸면서 다시 돌아오기 힘들었으리라.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외부환경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책도 많이 하였던 나의 20대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최선을 다했다고
그 시절의 경험들은 충분히 가치 있고 소중했다고
비록 찬란하게 빛나지는 못했지만 모든 게 처음이라 미숙한 게 당연하다고.
너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결국 다 잘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