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모른다고 믿었던 사람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시너》 시즌3

by 장면의 심리학

⚠️ 스포일러 주의 — 이 글에는 《더 시너》 시즌3의 결말을 포함한 핵심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 Netflix

《더 시너》 시즌3는 표면적으로는 범죄 스릴러지만, 실제로는 두 남자의 내면을 해부하는 심리극이다. 제이미와 앰브로스. 한 사람은 철학을 무기로 삼았고, 한 사람은 직업을 방패로 삼았다. 그러나 결국 둘 다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나는 두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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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이라는 이름의 중독

제이미는 겉으로는 완벽한 삶을 살고 있었다. 명문 사립학교 교사, 임신한 아내, 안정된 집. 그러나 그에게 그 삶은 감옥에 가까웠다. 살아있지만 살아있다는 감각이 없는 상태.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이인증(depersonalization)이라 부른다.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유리 너머를 바라보는 듯한 감각.


그런 제이미에게 닉 하스는 유일한 출구였다. 그들은 대학 시절 니체의 초인(Übermensch) 사상에 심취했다. 신은 죽었고, 삶은 무의미하며, 두려움을 정복한 자만이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다는 믿음. 다리에서 뛰어내리고, 서로를 생매장하고, 손을 칼로 찌르는 것은 그 철학의 실천이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수행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사실 그 게임들은 또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온몸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이것은 철학이 아니라 감각 추구 행동(sensation-seeking behavior)이라 보인다. 자해나 약물 중독과 유사한 메커니즘이다. 처음엔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점차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해진다. 마약 중독자가 내성(tolerance)이 생겨 더 높은 용량을 필요로 하듯, 제이미의 자극 추구도 점점 극단을 향해 에스컬레이션 되었다.


니체 철학은 그 스릴을 정당화하는 지적 외투였다. 제이미는 철학의 언어로 내면의 공허를 메우려 했지만, 그 절박함은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비극으로 흘러갔다. 닉은 아마 처음부터 그 위태로움을 알아봤을 것이다. 선생님이라는 제이미의 직업 설정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다른 사람의 성장을 돕는 역할을 하면서, 정작 자신은 대학시절의 어느 날에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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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이 차단된 아이가 자라면

제이미가 왜 그렇게까지 됐는지를 이해하려면 그의 내면이 형성된 방식을 봐야 한다. 그의 아버지는 감정적으로 완전히 부재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제이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감정이 어디에도 수용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랐다.


감정적으로 차단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이 실재하는지 스스로도 믿지 못하게 된다. 불안을 달래기 위해 손톱을 물어뜯거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위험한 행동에 끌리는 것은 같은 연속선 위에 있다. 감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시도다. 제이미는 그 연속선의 극단까지 간 것이다.


그런 제이미에게 닉은 처음으로 '네 감정은 진짜다, 그리고 그것을 느껴도 된다'라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닉의 영향력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닉은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제이미의 심리적 기원에 가까운 존재였다.


흥미로운 것은 제이미가 그래도 교사까지 됐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기능 트라우마(high-functioning trauma)의 전형이다. 겉으로는 완벽하게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내면은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상태. 심리적으로 예민하고 지적인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신의 공허함을 더 정교하게 언어화하고 합리화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둔감한 사람이었다면 그냥 술이나 마시고 끝났을 수도 있다. 제이미는 너무 예민하고 똑똑해서, 그 공허함을 니체까지 연결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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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 앞에 선 두 남자

드라마에서 가장 정교하게 설계된 부분은 제이미와 앰브로스의 관계가 거울 구조를 이룬다는 점이다. 제이미가 닉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앰브로스는 제이미를 바라본다.


제이미가 닉을 끝낸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닉은 제이미에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동시에, 절대 벗어날 수 없게 묶어두는 존재였다. 새로운 삶, 아이가 태어나는 삶을 살고 싶었지만 닉이 살아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했다. 떠날 수 없기 때문에 끝내버린 것이다.


앰브로스가 제이미를 총으로 쏜 것도 같은 구조다. 표면적으로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더 깊은 층에서 작동한 것은 다른 충동이었다. 제이미는 앰브로스에게 끊임없이 말했다. '당신도 나와 다르지 않다.' 제이미가 살아있는 한, 앰브로스는 그 불편한 거울을 계속 마주해야 했다. 어쩌면 그 목소리를 영원히 끄려는 충동도 작동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 앰브로스는, 자신이 제이미와 같은 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해 버렸다.


앰브로스가 제이미와 닮아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구체적이다. 앰브로스도 어린 시절 자신이 낸 불로 어머니가 입원하고 이후 세상을 떠났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시즌2). 매 시즌 그는 자신의 내면과 닮은 범인에게 끌린다. 다른 형사들이 외부에서 범인을 분석할 때, 앰브로스는 안으로 들어가 같이 앉는 사람이다. 그것이 그를 탁월한 형사이자, 불행한 인간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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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움을 인정한다는 것

제이미와 닉이 부정하려 했던 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두려움의 존재 자체였다. 두렵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이고, 약하다는 것은 존재가 하찮다는 것이라는 등식이 그들 안에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내면화된 수치심의 구조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던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방어 서사.


그러나 인간은 당연히 두렵다. 그 두려움 때문에 미래를 준비하고, 관계를 유지하고, 의미를 만든다. 두려움을 기능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두려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제이미와 닉은 후자를 택했고, 그 선택이 그들을 무너뜨렸다.


제이미가 죽는 순간 두려워했다는 것은, 드라마 입장에서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처음으로 자신이 그냥 인간임을 인정한 순간이다. 모든 철학도, 모든 게임도, 닉도 결국 그 앞에서는 아무런 보호막이 되지 못했다. 다만 너무 늦었다.


제이미가 무너지는 과정은 신경증적 붕괴이자 정체성의 해체였다. 이인증에서 시작해, 충동 조절 실패로 이어지고, 결국 닉의 환영을 보는 단계까지 이른다. 살인 현장에 종이접기 게임을 남긴 것은 그 붕괴의 상징이다. 어른의 범죄에 아이의 장난감. 내면의 충격이 처음 시작된 때로 퇴행(regression)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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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앰브로스의 눈물이 의미하는 것

시즌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냐가 묻는다. 제이미가 마지막에 어땠냐고. 앰브로스는 짧게 답한다. '두려워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에는 여러 겹이 있다. 제이미에 대한 연민. 그토록 두려움을 부정하며 살았던 사람이 결국 두려워하며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보다 무거운 층,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나도 지금 두렵다.'


앰브로스는 그 총격이 완전한 정당방위가 아니었음을 안다. 제이미를 끝내고 싶었던 충동이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을. 법적 판단과 별개로, 그는 이미 자신이 살인자가 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앰브로스가 제이미와 다른 지점이 있다. 그는 그것을 외부로 투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면의 어둠을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내보내는 대신, 그것을 자기 안으로 가져와서 들여다본다. 그 직면이 그를 훨씬 더 고통스럽게 하지만, 동시에 그를 파괴적이지 않게 만든다. 시리즈 전체가 앰브로스의 이 반복적인 직면의 이야기다.


자기 자신을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은 나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어둠을 정직하게 볼 수 있다는 의미다. 그 정직함이 앰브로스를 제이미와 같은 자리에 세우면서도, 결국 다른 결말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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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

《더 시너》 시즌3는 결국 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느끼지 못할 때,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제이미는 더 큰 자극을 향해 나아갔다. 앰브로스는 고통을 직면하는 것을 택했다. 그 차이가 전부였다. 두 사람 모두 두려웠다. 다만 한 사람은 그것을 알았고, 다른 한 사람은 죽는 순간에야 알았다.

앰브로스의 마지막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공포였다. 그리고 그 공포를 흘려보낼 줄 안다는 것이, 그가 여전히 살아있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