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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Nov 09. 2021

작가님이라는 말이 부끄러운 까닭

객관적 정의와 주관적 정의

운이 좋아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발을 들여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몇몇 지인들이 장난 섞인 말로 작가님이라는 낯선 호칭으로 나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꼭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써내고 싶다는 열망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책을 내본 경험도 없고, 글을 써서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는 탓에 아무리 농담이라곤 해도 "작가"라는 호칭은 아직 내가 받을만한 직함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부를 때면 누가 나의 커다란 치부를 남들 앞에서 들춰내기라도 한 것처럼 부끄러워져서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우리가 어떤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그 단어의 의미를 알고 난 뒤 내뱉게 될 때가 많다.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놓는 사람은 사기꾼이거나 철없는 아이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단어의 의미를 정의 내리는 작업은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단어를 사용할 때 객관적으로 정의 내리기도 하고 때로는 주관적으로 정의 내리기도 한다.


라면이라는 단어의 객관적이고 사전적인 의미는 특별할 것이 없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로 그것. 물을 부어 짧은 시간 안에 끓여먹는 인스턴트 음식의 한 종류. 그 이상의 어떤 상징도, 그 이하의 어떤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라면 앞에 괄호가 붙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할머니가 끓여주신) 라면"은 "라면"과 완전히 다르다. 개인의 서사가 녹아있고 특별한 감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차원에서 "작가"라는 단어를 바라보면 어떨까. 작가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문학작품, 사진, 그림, 조각 따위의 예술품을 창작하는 사람.


내가 작가라는 호칭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 나의 정체성이 부합되지 않기 때문일 테다. 나는 문학작품도 사진도 그림도 조각도 창작해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 교사가 된 뒤 한참 동안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낯설고 부끄러웠다. 왜 그랬을까? 교사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따위에서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


그런데 이상하다. 내가 교사가 되었다는 것은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실제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이후에 불리게 된 직업적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작가라는 말이 부끄러운 이유가 그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 부합하는 일을 아직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교사라는 호칭은 부끄럽지 않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교사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 부합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두 단어에 대해 이중적인 기준을 세워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작가라는 호칭은 사전적 정의에 부합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끄러웠고 교사라는 호칭은 주관적 정의에 부합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끄러웠던 터였다. 나는 교사라면 으레 이래야지 라는 나만의 기준이 있었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직 나는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교사라는 단어를 대함에 있어 그 기준은 변함이 없다. 사명감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교산데 교사가 그래도 될까?라는 생각이 머릿속 어딘가에 경계선을 그리고 있다. 그 기준을 넘어서는 것이 힘들어 때로는 자신과 타협을 하기도 하고 경계선을 허물기 위해 발버둥 치기도 한다. 어쨌든 교사의 사전적 정의는 내가 타인으로부터 교사라고 불리는 데 있어서 거부감이 생기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구분 짓는데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전적 정의는 세상과의 약속이다. 임용시험을 합격하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에게만 "교사"라는 호칭을 허용하고, 문학작품이나 사진 그림 조각 따위의 예술품을 창작해낸 사람에게만 "작가"라는 호칭을 허용하겠다는 사회적 합의. 이 사회적 합의는 당연하게도 중요하다. 돈과 종교가 인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작동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세상은 믿음을 기반으로 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 약속이 있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있어야 세상은 굴러간다.


하지만 주관적 정의는 자신만이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명예이자 특권이다. 사전적 정의에 부합하는 직함을 획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과정과 절차를 거쳤다고 할지라도 끊임없는 부끄러움 속에서 방황하는 이유는 자기 스스로가 그 직함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태생적으로 겸손함이 몸에 밴 탓에 늘 겸양을 미덕삼아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아마도 스스로가 설정한 주관적 정의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사"나 "작가"와 같은 호칭이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이와는 반대로 객관적 정의에 해당되는 과정조차 밟지 않고서 자기 혼자서 주관적 정의에 자신의 정체성을 부합시켜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사기꾼이라 부르면 적확하다.


객관적 정의는 개인이 어떤 직함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필요한 충분조건이다. 사회적 약속에 부합되는 롤을 획득하는 것은 최소한의 룰이기 때문이다. 주관적 정의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필수조건이다. 내가 설정한 그 단어의 의미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 때에서야 비로소 나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으며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 그 직함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주관적 정의는 무수히 많을 수밖에 없다. 모든 개인이 하나의 단어를 두고도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할 테니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작가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기에 작가라는 호칭이 그다지도 부끄러웠던 것일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처럼 이미 웬만한 주제에 대해서는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검증받으며 살아남은 위대한 작가들이 대부분의 이야기를 풀어놔버렸다. 그런고로 완벽히 새로운 주제로 이야기를 창조해 낸다는 것은 과학자가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로운 것을 쓸 수 없다면 작가라는 존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새로운 것을 쓰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없겠다. 그렇게 정의해버린다면 작가라는 직함은 머지않아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자신을 이야기 속에 던질 수 있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작가는 그런 사람이다. 새로운 것을 쓰는 것이 어려워졌다면 같은 주제를 쓰더라도 어딘가에서 베껴오지 않고, 이것저것 짜깁기하지 않고, 완벽히 나의 언어와 나의 경험과 나의 삶으로 이야기를 새롭게 채색해 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작가라는 칭호를 가져갈 만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작가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을 구체화해보기는 이 글을 쓰며 생각해 본 것이 처음이지만 아마도 대략 그런 느낌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기에 작가님이라는 지인들의 호명에 몸 둘 바를 몰라하며 부끄러워졌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관적 정의를 내리는 행위는 중요하다. 사람은 자신이 정의 내리는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관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교사라고 불리려면 적어도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작가라고 불리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할 때에만 비로소 언젠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지 않는 미래는 결코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작가라는 또 다른 나의 자아가 완벽히 내 안에 자리 잡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부끄러움의 껍질을 깨고 온전히 작가라는 호칭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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