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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Oct 14. 2021

아무 노래, 아무 말, 아무 글.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세상 모든 것들이 각자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말이 사실인지. 평생을 들여 들여다보아도 도무지 내 눈과 마음으로는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존재들조차 존재로써의 어떤 특명을 부여받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 하니, 때로 이 무한한 사랑의 태도가 거슬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본인을 둘러싼 모든 것들, 아니 가능한 많은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일은 가치롭다는 측면에서 모든 것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노력은 그 나름의 박수를 받을만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그런 삶의 자취를 따라 흘러왔던 것 같기도 하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서 혼자만의 가치를 발견하기도 한다. 효용성과 환금성이 절대 진리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삶의 태도는 정말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방식으로 삶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자본에서 구하소서. 자본을 떠난 인생을 생각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자본에서 자유롭고 싶다. 역사를 통틀어 힘과 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시대가 있었겠느냐만, 그 속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실제로 탈자본주의적 삶을 실천해 낸 사람들이 왜 없으랴. 다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삶으로 직접 실천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즉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라디오를 듣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시대의 변화와 기술의 진보에 따라 라디오의 기능을 대체할 수많은 기기들이 세상에 나타났고 라디오는 그 존재의 이유를 더 이상 찾기 힘들어졌다.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려야 한다면 존재의 이유는 시대를 벗어나서는 찾기 어려운 것일까. 존재 자체로 소중한 것,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치로운 것, 그래서 의미를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소중하다. 스스로 의미를 찾고 부여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변화에 종속되지 않는 영원하고도 유일한 존재의 당위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소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은 시대를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에 모든 것이 종속되어 변해간다고 해도 내가 마음을 줄 대상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나의 마음은 나의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강력한 힘이면서 동시에 무거운 부담을 준다.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여기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끊임없이 마음을 들여다보고 단련해야 하는 이유일 테다. 내 마음을 알지 못하면 나의 모든 것은 외부에 종속되어버리고 만다. 재산, 외모, 직업과 같은 외부로 직접 드러나는 것들 뿐만 아니라 취향, 취미, 성격처럼 직접 드러나지 않는 것들조차 내 마음의 기준이 없다면 너무나 쉽게 흔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외부의 기준이다.


사실 타인의 시선이나 세상의 기준 같은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장벽은 우리를 죽을 때까지 괴롭힌다. 어떤 사람은 외부의 기준을 쫓으며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용감하게 내부의 기준을 쫓으며 살아간다. 물론 나처럼 그 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끼인 채로 살아가며 고통스러워하는 부류도 존재한다.   


아마도 그것이 고통의 근원일 테다. 외부의 기준을 좇기로 결정한 사람의 삶은 괴롭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기준에 나를 맞추며 내가 원하는 것이 마침 세상이 원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며 달려가는 경주마는 슬프지 않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니까. 세상은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니까.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고 돈이면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되니까. 자본은 위대하고 곧 신에 필적할만한 절대적 진리이니까. 내부의 기준을 좇기로 결정한 사람 역시 괴롭지 않을 것이다. 외부의 저항에 때때로 부딪히기는 할 테지만 명확한 자신의 기준을 세운 사람들은 그런 장벽쯤은 가볍게 헤집어낼 준비가 되어있다. 문제는 언제나 중간에 낀 사람들이다.  


자주 괴로움이 찾아온다. 세속적 기준과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물쩡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될 스트레스를 늘 겪는다. 명확하고 당당하게 한쪽의 포지션에 서있었다면 반대쪽에서 다가올 저항, 굳이 수치로 표현하자면 50 정도 받게 될 정신적 스트레스를 중간에 끼어있는 탓에 양쪽 모두에게 받아 100만큼 받게 된다.


차근차근 하나씩 하면 된다는 말은 과연 사실일까. 차근차근해서 될 일이 있고 단박에 계단을 뛰어올라야 하는 일이 있다. 삶의 자세를 바꾸는 일은 차근차근해야 할 일일까. 단박에 바꾸어야 하는 일일까. 사실 바꾼다는 말이 조금 어색하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내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카페에 앉아 책을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말에 부응하기라도 하려는 듯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그에 대해 글을 쓰며 지적 유희를 즐기는 일이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즐거워진다. 부업이 되면 더욱 좋을 테지만 경제적 이득을 차치하더라도 생각하고 쓰는 행위는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그럴 깜냥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한때는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된다면 평생 읽고 쓰는 삶을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타오르는 불꽃이 잠시 빛을 내다 이내 사그라드는 것처럼 글쓰기에 대한 욕망 역시 잠시 피었다 사그라들 찰나의 순간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인지 글쓰기에 모든 것을 걸만큼의 용기가 나지 않는다. 다만 하는 데까지는 해보자는 생각을 붙잡고 있을 뿐인데 이 생각이 자꾸 세속적 욕망과 부딪히게 된다.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승진도 하고 재테크에 성공도 하고 가족에게 헌신하고 하고 싶은 공부도 하는 삶을 살면 되지 않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그럴 역량이 안된다는 것쯤은 이미 예 저녁에 알고 있었다.   


파장은 작게 시작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마음 역시도 그렇다. 작은 틈 사이로 삐져나온 갈등의 초록 새싹은 무럭무럭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을 잡을 것인가.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언제쯤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 모를 이 고민을 몇 년째 이어오고 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타고난 역량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철학 공부를 시작했고 명리학을 살펴볼까 기웃거려 본다.


하루가 무척이나 짧다.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때때로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구분하지 못해 그것을 구분하는데 시간과 정열을 쏟느라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을 허무하게 흘려보낸다.


이렇게 아무 말이나 해도 결국 글이 된다. 글도 그렇고 삶도 그렇다.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 같지만 지나고 나면 이리저리 엮여 나름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 아니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 가만히 놔두면 모든 것은 흘러가버리고 만다. 이리저리 엮어두고 붙잡아 두었을 때 의미 없는 조각들은 의미를 갖게 된다. 마치 이 글과 이 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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