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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Apr 01. 2022

알아서 뭣하게

앎에서 삶으로

음악을 듣는다. 하릴없이 플레이 목록을 넘긴다. 특별히 장르를 가려가며 듣지는 않는다. 다만 모르는 곡들을 들을 때면 다음 곡으로 넘기지 못하게 내 손을 멈추게 만드는 음악들이 있다. 그런 음악들은 보통 웅장하고 장엄하거나 끝도 없이 아래로 아래로 침잠할 것 같은 음악일 때가 많다.


글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면 좋고 싫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텍스트나 영화의 장면은 우리가 해석할 수 있는 영역의 자료인 까닭이다. 글자와 이미지는 우리의 경험이나 상상력과 곧바로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좋고 싫음을 구분 지을 수 있으며 우리의 감정과 쉽게 링크되어 해석이 용이하다.


허나 음악과 그림은 글이나 영상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보고 듣는다고 해서 곧바로 그 의미가 파악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경험과 연결 짓는 것도 어렵다. 모든 창작물들이 그러할 테지만 음악과 그림은 이면에 숨어있는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작품을 제작할 당시의 감정 상태나 처해있던 상황, 지향하는 가치 같은 창작자의 삶을 알면 알수록 그 작품의 세계관을 해석하고 동화되기 수월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과 미술은 글이나 영상보다는 조금 덜 친절한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음악을 듣고 미술 작품을 감상하며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들을 느낀다. 기쁨과 슬픔, 희열과 절망, 감탄과 경외, 유쾌와 불쾌.. 그렇다면 나는 웅장하고 장엄하거나 침잠하는 것 같은 류의 음악을 들으며 어떤 종류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기에 그런 음악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고양감" 때문이다.


고양감이란 구름 위에 붕 떠있는 것처럼 정신이나 기분이 한껏 고조되는 상태를 뜻한다. 이런 음악을 들을 때 고양감이 드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완벽한 몰입을 가져다줘서? 잠시나마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내 감성의 메커니즘과 어디쯤엔가 맞닿아 있어서? 이래저래 생각해봐도 정확한 이유를 알아내기 어렵다. 그러다가 문득 이유를 모르겠으니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는 질문을 어디까지 던져야 하는가


이놈에 "왜"라는 질문에 자꾸 답하려는 버릇은 피곤하고 때때로 골치가 아프기까지 하다. 철학자들은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 왜냐는 질문을 세상과 자신에게 자주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교실에서 아이들의 사고력과 창의력을 길러주기 위한 발문의 중요성은 교육대학교 1학년만 되어도 마르고 닳도록 듣게 되는 말이다. 이는 맞는 말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왜냐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중요하다. 세상은 그렇게 발전해 나가기 때문이다.

  

왜냐는 질문에는 인과 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된 원인,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은 과학적 사고관이다. 현대 사회의 핵심 패러다임은 자본주의와 과학만능주의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현시대를 관통하는 생각이 나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가끔은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현상들도 있다. 특히 인간 내면의 문제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것들은 인과 관계를 명확히 밝혀내기 힘들다.


힘든 것을 해결하려는 의지도 중요할 테지만 힘든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도 중요하다. 그래서 때로는 복잡하게 왜냐는 물음을 던지지 말고 그냥 그 자체를 즐기고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해서 삶을 잘 살아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앎으로 삶을 살아내는 것도 중요할 테지만 삶으로 앎에 도달하는 순간 역시 존재하는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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