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호 Jul 04. 2020

커트라인 인생

넘어갈 것인가, 넘어질 것인가

 넷플릭스 블랙 미러 시리즈의 에피소드  하나인  '추락'편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극단적으로 소셜 네트워킹이 구현된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은 평점이 곧 자신을 나타내고 거의 모든 것을 구속하는 사회에서, 보다 높은 평점을 얻어 더욱 나은 삶을 향유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던 와중에 평점이 부족하여 원하는 집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더욱 높은 점수를 보유한 '셀럽'들과 새로운 관계를 도모하여 집을 구할 수 있을 만큼의 평점을 쌓으려 노력하지만 결국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벗어던지게 되고, 그로 인해 평점은 제로에 가깝게 수렴하게 되지만 그제야 인간 본연을 들여다보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에피소드였지만 그중 커트라인 집중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위에서 소개한 드라마에서 평점 커트라인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듯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도 많은 커트라인들이 존재한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겪어보았을 법한 예시로 시험 점수로 인한 당락 결정을 들 수 있겠다. 고입, 대입, 취업, 각종 자격증 시험 등, 시험이란 시험은 죄다 커트라인이 존재하니 말이다.


 차상위 계층이나 기초생활보호자 역시도 커트라인이 존재하는데 경계선 어딘가 애매한 위치에 속해 있어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토해내는 불만 역시도 어쩔 수 없지만 커트라인이 빚어내는 비극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외에도 신용등급에 따라 대출을 1 금융권에서 받을 수 있느냐, 2 금융권도 모자라 3 금융권까지 떠밀려가야 하느냐는 고민을 하게 하기도 하고, 아파트 분양권 가점제에 있어서 1점이 모자라 탈락하는 경우에 흘리는 눈물은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아파트 값에 비례하기도 한다.


 연애에는 나이의 커트라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만 결혼 시장에서는 분명 암묵적으로 나이의 커트라인이 존재한다. 심지어 학창 시절 두발 제한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요즘은 사라졌지만 10여 년 전 고등학생 시절에 자로 머리를 잰 뒤 두발 2센티! 하며 바리깡으로 밀리던 수모를 겪어야 했던 일 역시도 머리는 2센티보다 짧아야 한다는 커트라인을 넘지 못했기에 감수해야 했던 일인가 싶어 마음의 평정심이 흐트러진다. 즘은 입대도 순번을 기다려서 해야 한다고 하던데 거기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커트라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커트라인의 문턱을 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아득하고도 까마득한
어떤 공포를 마주하게 된다.


 합격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로 얼마만큼의 세월을 더 담보 잡혀야 할 것인지, 내일 당장 지출해야 할 생활비가 막막한데 국가의 지원이 중단된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이 급작스럽다. 같은 돈을 빌리는데 누구는 부담 없는 이자를 이용하여 사업적 리스크를 줄여나가고 누군가는 고금리 대출이자 갚기에도 급급하여 사업 확장은 꿈조차 꿀 수 없다.


 굳이 이런 예시가 아니어도 우리에겐 모두 커트라인을 넘지 못해 겪었던 불편하고 괴로웠던 순간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기억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받았다고 표현해주고 싶다.


 반대로 커트라인을 넘었을 때 느껴지는 만족감은 넘지 못했을 때의 괴로움과 비례하여 매우 짜릿한 경험을 선사해주며 쉽사리 잊기 힘든 순간으로 우리의 기억에 각인되고 넉넉한 점수로 여유롭게 합격한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희열과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해준다. 꼭 시험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열심히 노력해도 잘 안 풀려 포기 직전까지 다다랐다가 극적으로 성취하게 되는 경험은 모두 그러하다.


 나는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지난 삶을 돌아보니 경계를 넘지 못해 주저앉았던 적도 물론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커트라인을 가까스로 넘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많았다. 말 그대로 커트라인 인생이었다.


고입 연합고사


 우리 세대는 중학교 내신점수(70점 만점)에 연합고사(180점 만점)라는 시험을 보고 점수를 합산하여 고등학교에 지원을 했다. 지역별로 치러지는 미니수능의 느낌이랄까?


 중학교 3학년 3월 첫 모의고사 점수가 80점이었던 기억이 난다. 특별히 원하는 고등학교가 있지는 않았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을 인지하고 있던 당시에 나는 왜인지 공부라도 해놔야 먹고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을 빡쎄게 했다. 그 전엔 공부를 해본 적도 학원에 다녀본 적도 없어서 그냥 무작정 오래 앉아있는 것 말고는 방법도 요령도 몰랐다. 다행히도 점수가 꽤 올라줘서 원하는 고등학교에 턱걸이로 입학할 수 있었다.

 

대입 수학능력시험


 중학교 공부는 1년 바짝 해서 결과가 나와줬지만 고등학교 공부는 그렇지 않았다. 중학교 때와 변함없는 마음가짐과 성실함으로 꾸준히 공부를 했다. 과장하지 않고 정말로 먹고 자는 시간 빼고는 공부만 하던 시절이었는데 기초가 부족했던지 머리가 나빴던 것인지, 성적은 2학년 말까지 제자리였다. 조바심이 났고 걱정이 되었다. 3년 간의 세월이 허송세월로 남을까 불안했고, 확정되지 않은 미래가 무서웠다. 


 한데 2년간 쌓였던 공부가 고3이 되자 성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3월 모의고사부터 매월 모의고사를 칠 때마다 점수가 올라갔다. 7월 즈음엔 전교 10등 안쪽으로 진입하는 쾌거를 루었다. 


 그때까지도 어느 대학을 가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먹고사는 일만 해결되면 될 일이었다. 그때 마침 애국심에 불타던 한 친구가 같이 사관학교에 가자고 권유했다.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들어가기만 한다면 먹고 살 걱정이 해결되는 사관학교에 지원을 했다. 1차 사관학교 자체 필기시험에 통과했다. 기뻤다. 무언가 실마리가 잡히는 듯했다. 2차 신체 체력검사를 받으러 진해 해군사관학교로 향하는 가벼웠던 발걸음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천국과도 같았던 기쁨도 잠시 신체검사를 받던 도중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됐다. 내가 갖고 있던 색약이 입학을 하더라도 나중에 진급 시 발목을 잡게 될 것이라는 말. 그것은 40대 즈음에 이르러서 군복을 벗고 전역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안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나에게 그것은 입학도 전에 내려진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하여 신체검사를 끝까지 마치지도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중도 퇴소를 하고 말았다.


 스스로 선택한 결정이긴 하였으나 신체조건이라는 커트라인을 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후 어찌어찌하여 재수를 하는 과정이 있었으나 교육대학교에 예비번호를 받고 추가 합격으로 입학하게 된다. 임용을 봐야 하겠지만 먹고 살 걱정은 한시름 내려놓게 된 것이다.


입대


 입시의 두 관문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겨우 겨우 따라가기 벅찼던 그 시절, 힘들었지만 결국 경계선 안으로 진입하는 것에 성공했고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제는 군대를 생각할 때가 되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주변에서는 남자다움과 리더십을 어필하며 해병대를 권했다. 나는 좀 편하고 싶었다. 지난 4년간 온 힘을 다 써버린 느낌이어서 더 이상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싶지 않았다. 공부한다고 그간 미뤄왔던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나는 다한증이 있다. 신체검사를 앞두고 알아본 결과 주먹을 쥐고 2분 30초 안에 땀방울이 바닥으로 뚝 하고 떨어지면 4급 공익 판정을, 2분 안에 떨어지면 5급 면제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흐르는 땀의 양을 고려해 보았을 때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다한증 중에서도 중증이었기 때문이다. 사관학교를 꿈꾸었던 사람이 공익을 받으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약간의 내적 갈등도 겪어야 했지만 어쨌든 그때는 그랬다. 신체검사 당일이 되었다. 최선을 다했다. 이런... 에어컨이 너무 빵빵하다. 평소에는 가만히 있어도 줄줄 흐르던 땀이 그날따라 긴장되었던지(?) 나오질 않았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결과는 1급 현역 판정을 받아버렸다. 억울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다. 커트라인을 넘지 못해 나의 2년이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후에 교통사고로 인해 십자인대 파열이 되어 4급 판정을 받고 나의 원(?)이 씻겨 내려가기는 했으나 그전까지 저 신체검사의 기억은 우습고도 허탈했던 경험으로 나의 삶에 스며들어있다.


교원 임용


 대학 4학년, 또 한 번의 커트라인을 넘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임용고시. 고시라고 해야 한다, 고사라고 해야 한다 말이 많지만 무튼 임용이 다가왔다. 고입 대입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연합고사와 수능은 여러 가지 선택지 가운데 내가 골라갈 수 있는, 원한다면 다소 불만족스럽더라도 어쨌든 선택지가 있는 시험이었다고 한다면 임용은 선택지가 없었다. 합격해서 이놈의 수험생활을 벗어나거나, 탈락해서 일 년을 또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결론은? 첫 해에 1점 차이로 떨어졌다.


 말 그대로 1점. 한 문제 차이였다. 고통스러웠다. 고쳐서 틀렸던 한 문제, 조금 더 고민해보지 않았던 한 문제, 논술시험 때 끝까지 고칠까 말까 했던 한 가지 예시, 면접 때 대답했던 답변들, 면접 때 좀 더 웃을걸, 좀 더 과감해볼걸, 어디선가 미세한 변화로 획득할 수 있었던 1점을 찾아내느라 도저히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재수를 했다. 결과는? 1점 차이로 합격했다. 이럴 수가! 1년 전 상황이 떠오르며 정말이지 소름이 끼쳤다. 1점 차이로, 한 문제 차이로 이렇게 사람의 상황이 바뀌고 사람의 마음이 바뀌는 경험을 할 수가 있다니. 종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군지 모를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브런치 작가 등록


 4번의 도전 끝에 브런치 작가로 등록되었다.

수능과 임용을 재수하는 덕에 재수에 익숙해졌다. 브런치 작가 등록 역시도 한 번에 안될 줄 알았다. 한 번에 가 척 하니 합격해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그러려니 했다. 한데 두 번, 세 번째 떨어지게 되니 약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노까지는 아니고... 황당함? 궁금함? 오기? 한편으론 설렘이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알고 있다. 여러 번의 도전 끝에 얻게 되는 성취는 그만큼 값지고 나를 기쁘게 만든다는 것을. 결국 4번째 도전 끝에 통과했다. 행복했다. 무의식 중에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 합격하게 될 것이고 그때는 한 번에 합격했다면 느낄 수 없는 기쁨을 느끼리라는 것을.


 대단한 성공 신화는 아니지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 수상 소감에 힘입어 내가 겪어온 삶의 궤적을 살피고 거기서 나오는 이야기를 해봤다. 나의 삶에 있어서 커트라인을 가까스로 넘어서는 순간이 몇 번 있었고, 그 경험이 나에게 준 것은 감사할 줄 아는 마음과 온전히 그것을 기뻐할 수 있는 만족감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다. 우리가 살면서 어찌 마음대로 커트라인을 가까스로 넘기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까. 열심히 노력하고 그러다가 운이 좋다면 넘어가는 것이고 운이 없다면 넘지 못할 뿐이다.

누군가는 넘지 못한 것이, 넘어진 것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 경계선을 넘지 못한다고 해서 틀린 인생도 아니고 실패한 인생도 아니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에 새로이 넘어서야 할 경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다만 운이 좋길 바란다. 여유 있게 넘어가는 것이 마음 편하겠지만 그것이 힘들다면 턱걸이로라도 꾸역꾸역 넘어가길 바라며 오늘도 기쁜 마음과 감사함을 가지고 하루를 살아가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