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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Jun 14. 2024

교토에서 온 편지

고향에 대한 각자의 시선

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는 네 여자가 품고 있는 각자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다.


엄마 화자(차미경)는 일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한국으로 건너왔다. 일본에 남겨두고 온 엄마와 얼마간 편지를 주고받지만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마저 끊기고 만다. 먹고살기 바빠 평생 한 번도 찾아가 보지 못한 일본은 그녀에게 늘 그리워하면서 갈 수 없었던 곳이다. 치매 판정을 받고 기억을 완전히 잃기 전에 엄마의 흔적을 찾고 싶었던 화자는 딸들에게 일본에 가고 싶다는 말을 건넨다. 수십 년 전 바다 건너 날아온 편지를 붙들고 화자는 어머니의 흔적을 찾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보았으나 너무 오래전에 끊어진 인연의 끈은 결국 이어 붙일 수 없었다. 그렇게 화자에게 고향 일본은 엄마의 흔적, 그리움의 대상, 자신의 뿌리였으나 영원히 가 닿지 못할 공간으로 남게 된다.


화자는 부산 영도에 정착해 50년을 살며 세 딸을 낳아 길렀다. 그중 첫째 혜진(한채아)에게 고향 부산은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곳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장녀라는 이유로 맏딸 혜진은 엄마와 동생들을 보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 시대에, 그런 상황에 처한 첫째들이 으레 그러했듯, 혜진은 자신의 꿈 따위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생계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헌신한다.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곳. 하지만 언제든 기회만 된다면 떠나고 싶은 곳, 혜진에게 고향은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으리라.


둘째 혜영(한선화)은 언니의 희생 덕에 꿈을 찾아 서울로 간다. 작가가 꿈인 혜영은 강퍅한 서울살이를 하며 틈틈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글을 쓴다. 하지만 글을 써서 먹고사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던가. 방송국에 취직해 생계를 유지하며 같은 꿈을 품은 남자친구를 만나 행복한 꿈에 젖어 지내던 시절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현실이라는 벽이 되어 서서히 그녀의 목을 조른다. 남자친구의 등단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하고 먹고살기 바빠 자신의 글을 쓰지 못하는 답답한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혜영은 고향 부산으로 도피한다. 혜영에게 고향은 의지할 가족들이 있어 힘들 때 도피할 수 있는 은신처다.


셋째 혜주(송지현)는 고등학생이다. 한창 꿈이 많고 발랄할 나이인 데다, 두 언니의 상반된 삶을 지켜보며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꿈 많은 청춘이다. 혜주는 댄서를 꿈꾸지만 둘째 언니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도 한다. 그렇게 그녀는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며 부산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조금씩 미래를 위한 성장통을 겪는다. 혜주에게 고향 부산은 둥지다. 현재는 머무르고 있으나 언제고 반드시 떠날 것을 기약하는 곳, 에너지의 원천이지만 필연적으로 독립해야 하는 곳. 영화 후반 스무 살이 되어 서울로 상경한 혜주는 부산에 정착한 혜영과 통화하며 묻는다. "언니 서울은 원래 바다가 안 보이나, 바다가 안 보이니까 뭔가 이상하다." 낯선 공간에 편입된 뒤에야 혜주는 고향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받아들인다. 시간이 흘러 혜주는 고향을 어떤 이미지로 각인하게 될까.


혜영: 왜 물건을 안 버리는 거야

화자: 너무 사랑하면 만지고 싶은 마음을 아니?


고향에 돌아온 혜영은 엄마의 생활방식이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물건을 버리지 않고 쌓아두는 모습에 자주 화를 낸다. 자신의 어릴 적 물건을 여전히 쌓아두고 있는 모습, 냉장고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르면서 음식을 가득히 채워놓은 모습, 어릴 적 아버지가 사 온 접시 세트를 옮기다가 깨뜨리고도 버리지 않는 모습, 혜영이 보기엔 비효율적인 생활습관일 뿐인 엄마의 습성이었지만 엄마의 한마디 말에 혜영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다.


잔잔한 이야기에 울림이 있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들의 이야기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는 모두가 주인공인 영화다. 어느 한 배우의 인기에 의존하지 않고 각각의 캐릭터와 이야기가 살아있는 영화. 감독의 실제 가족사가 스토리에 녹아있다고 하는데 역시 개인의 이야기는 보편성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나의 이야기 이기도 한 탓에 관객의 집중도를 높인다. 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는 그렇게 가족과 고향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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