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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고도를 기다리며

벗어나거나 헤매거나

by 정 호

"내 인생 책이다 읽어봐"


교직을 그만두고 사교육계로 거처를 옮긴 한 선배는 자신의 인생 책이라며 책을 한 권 선물했다. 늘 불안에 쫓기는 듯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던 선배이기에 책의 제목을 보며 무언가 그의 삶과 일치되는 지점이 보이는 듯했다. 오지 않을 고도를 평생토록 기다리는 인간의 어수룩함이 자신의 삶과 겹쳐 보였던 것일까.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일종의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었을까. 책 내용을 알지 못했지만 제목만 봐도 내용을 렴풋이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혼자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빨리 읽어봐야 한다는 마음으로 침대 머리맡에 책을 올려 채 한 달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선물 받은 책을 서둘러 읽어내야 한다는 부채감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SNS는 책 읽기가 싫으면 연극이라도 보라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광고를 띄웠고 나는 망설임 없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서둘러 예매했다. 연극을 예매한 이유는 책 보다 연극이 내용 흡수를 더 쉽게 도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게으른 마음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책을 선물한 사람의 인생을 조금 더 농밀하게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어떤 마음으로 책을 읽어냈길래 인생 책이라며 후배에게 선물한 것일까. 그 고맙고 무거운 마음을 오롯이 받아내기 위하여 책을 읽기 전 연극을 감상하며 예습을 하려 했다.



블라디미르: 이 세상에 고통을 당하는 게 너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아?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거지. 네가 내 입장이라면 무슨 소릴 할는지 보고 싶구나. 당해 봐야 알 거다

에스트라공: 너도 아팠냐?

블라디미르: 아팠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고해,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 하지 않던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사무엘 베케트 역시 비슷한 생각으로 세상을 통찰했던 모양이다. 그는 어찌하여 인생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았을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언제 올지도 모를 "고도"라는 대상을 하염없이 기다리기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인간이 자신의 생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본질적인 이유이자 벗어날 수 없는 본능이기에 인간은 애초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바라본다. 도를 기다리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때로는 심심해 마지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 고통과 지난함을 견뎌내기 위해 인간은 여러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분노하고, 외면하려 해 보지만 여전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그것. 고도는 그렇게 인간으로 하여금 멈출 수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갈망을 부추기며 괴로운 삶을 이어가게 한다. 슬프도록 허무한 것은 그토록 갈망하는 고도라는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는 데 있다. 그에 더해 그 고통이 끔찍하게 외로운 이유는 우리는 모두 자신의 고도에 손을 뻗치느라 타인의 고통을 살필 줄 모르게 된다는 데 있다. 인간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느라 생의 대부분을 소모시키며 외로워진다. 고전 희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렇게 기다림과 외로움에 대한 통찰을 담아낸다.


모순된 인간의 삶을 드러내는 장면들은 희극이라는 장르의 특성답게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 끝맛이 몹시도 쓰다. 잠든 에스트라공을 자신이 외롭다는 이유로 굳이 깨워내는 블라디미르는 인간의 나약함을 선명하게 인쇄한다. 하지만 잠에서 깬 에스트라공이 무서운 꿈을 꿨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고 하자 블라디미르는 그런 이야기는 질색이라며 나에게 쏟아내지 말고 혼자서 삭히라고 말한다. 외로워서 늘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지만 타인의 짐을 함께 짊어지기는 싫어하는 모습이 어쩜 그리도 인간의 모습을 닮았는지 극을 보는 내내 감탄과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에스트라공은 외롭다며 블라디미르에게 자신을 좀 껴안아 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블라디미르가 자신을 껴안자 곧바로 마늘 냄새가 난다며 다시 밀어낸다. 인간은 이처럼 끊임없이 유대와 고립이라는 모순되는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두 눈으로 인식하며 일종의 안도와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에스트라공: 목이나 매고 말까?

블라디미르: 나뭇가지에? 이 나무는 믿을 수가 없는 걸

에스트라공: 그래도 한 번 해보자.

블라디미르: 너 해봐라

에스트라공: 네가 먼저.

블라디미르: 아냐. 네가 먼저 해봐

중략

블라디미르: 그럼 어떡한다?

에스트라공: 아무 짓도 안 하는 거지. 그게 더 안전하니까

블라디미르: 그자가 뭐라고 할지 어디 기다려보자.

에스트라공: 좀 두고 보자는 거야

블라디미르: 가족들하고 의논도 하고.
에스트라공: 친구들하고도
블라디미르: 지배인들하고도
에스트라공: 거래상들하고도
블라디미르: 자기 장부하고도
에스트라공: 은행 통장하고도
블라디미르: 그래야 결정을 내리겠다는 거지

에스트라공: 그런데 우리는?

블라디미르: 뭐라고?

애스트라공: 그 일에서 우리의 역할은 뭐냔 말이다.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지만 따져보면 자유의지로 무언가를 선택한 적이 거의 없다. 커다란 결심에 앞서 먼저 해보라고 타인의 등을 떠밀어 안전성을 확인한 뒤에야 움직일 용기를 얻고, 가족 친구 통장 잔고 등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환경들로부터 적당한 조언을 얻어낸 뒤에서야 행동에 나설 아주 작은 용기를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본인 스스로가 행위자로서 당당하고 마땅한 근거가 된 적은 없다. 오직 움직여도 괜찮다는 주변인과 여러 가지 여건의 위로만이 우리 행동의 근거가 될 때가 많다. 이런 상황 앞에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추종하는 존재라고 어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가장 위험하고도 무서운 일은 그토록 많은 외부의 조건을 살펴본 뒤 적당히 만족스러운 안정적 근거들을 확보한 뒤에서도 끝끝내 움직이지 못하고 "안전하기 때문에 아무 짓도 하지 않는" 상태로 머무르며 당당하게 독립적 행위자로서 기능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인간은 겁이 많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둘은 끊임없이 대화를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맥락이 뚝뚝 끊어지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문서답도 부지기수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란 애초부터 그런 것이 아닐까. 미지의 존재, 그려낼 수 없는 존재인 탓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서로 전혀 알아챌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본디 외롭고 불안에 떠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 탓에 서로를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삶과 인간을 그려낸 극이 결국 비극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본질적 이유인 셈이다. 에스트라공은 블라디미르에게 통찰이 담긴 핵심적인 질문을 하거나 어떤 제안을 끊임없이 던진다. 우리 목이나 매고 말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 그 일에서 우리의 역할은 뭐냔 말이다! 우린 꽁꽁 묶여 있는 게 아닐까? 날뛰어봤자 소용없는 일이지...


포조: 고도는 누구요? 날 고도로 잘못 보지 않았소.

블라디미르: 그건... 저... 그냥 아는 사람이죠

에스트라공: 알긴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랍니다.

블라디미르: 그러면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요... 하지만...

에스트라공: 저 같으면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요

포조: 그런데 당신들은 나를 그 사람인 줄 알았단 말이요.

에스트라공: 그건... 그러니까... 날이 어두워진 데다가... 피곤하고... 기운 없고... 기다리느라 지쳐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만 잠깐 그런 생각이...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게 그토록 우스운 짓이었을까.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끊임없이 그것을 기다리기만 하는 인간을 치밀하게 비웃는다. 심지어 오래도록 기다려온 탓에 어느 때엔 전혀 상관없는 것을 그동안 기다려온 것이라 스스로 합리화시켜 버리기까지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데에 이르러 그 냉소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게 된다. "도리가 없지" 이것이 사무엘 베케트가 인간을 바라보는 핵심적 언어는 아니었을까. 인간은 도리가 없는 존재. 고도를 기다리는 것도, 앞서 말한 모든 허무맹랑한 짓들을 하는 것도,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 별 도리없이 앞으로도 계속 행할 것임을. 베케트의 회의주의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납득할 수밖에 없는 강제력을 획득한다. 그리고 그의 생각에 동의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두 가지 갈림길 앞에 서게 된다. "도리가 없다"라며 존재의 태생적 한계를 받아들이고 여전히 같은 삶을 반복하든지, "그래도 한 번 해보자"라며 묶인 쇠사슬을 끊고 썩은 나뭇가지일지언정 목이라도 한 번 매어보며 그토록 기다리던 고도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든지.


에스트라공: 짐 말이오! 왜 그렇죠? 계속 들고 있으니, 절대로 땅바닥에 놓는 일이 없으니. 왜 그러냐고요

포조: 그건 내게 감동을 주려는 거요, 버림받지 않으려고. 저놈은 제가 훌륭한 짐꾼이라는 걸 내게 보여주면 내가 저를 앞으로도 계속 짐꾼으로 쓸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짐꾼이 저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오.


포조의 대사를 통해 사무엘 베케트는 인간이 고도를 기다리며 행하는 수많은 자기희생의 쓸모없음을 일침 한다. 본 적도 없고 언제 어디에서 만날지 정하지도 않은, 아니 그에 앞서 애초에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막연한 허상을 기다리는 인간을 바라보며 베케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으리라, 그렇게 그의 나이 40 중반에 이르러 그는 생의 한 단면을 명확히 바라보게 된다.


등장인물은 모두 인간의 우스운 모습을 표현한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대화를 통해 인간의 아둔함을 드러낸다. 그에 반해 럭키는 대사 하나 없이 포조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다가 생각할 수 있는 모자가 머리에 씌워지자 딱 한 번의 대사로 그동안 막혀있던 생각들이 뒤죽박죽 얽혀 폭발하는 모습을 보인다. 발화가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듯 중간중간 버벅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럭키를 포조는 못마땅한 모습으로 바라본다. 키가 각을 시작하게 되는 것도 생각을 멈추게 되는 것도 블라디미르가 모자를 씌우고 벗겨줌으로 인해 촉발되는 행동이라는 점이 우습다.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고 멈추는 것은 인간에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 것일까.


블라디미르: 확실한 건 이런 상황에선 시간이 길다는 거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우린 온갖 짓거리를 다 해가며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는 거다. 뭐랄까 얼핏 보기에는 이치에 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버릇이 되어버린 거동을 하면서 말이다. 넌 그게 이성이 잠드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짓이라고 할지 모르지. 그 말은 나도 알겠다. 하지만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성은 이미 한없이 깊은 영원한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너 내 말 알아듣겠냐?

에스트라공: 인간은 모두 미치광이로 태어나는 거다. 그중에는 끝내 미치광이로 끝나는 자들도 있고


인간은 스스로를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어쩌면 우리의 행위는 모두 헛짓거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정신이 나가버린 사람을 미치광이라 칭하며 안타깝게 바라보듯 미치광이로 태어났지만 미치광이에서 벗어난 이들은 여전히 미치광이로 남아있는 인간들의 이런 헛짓거리를 보며 우리가 소위 정신병자라 일컫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미쳐버린 걸까, 처음부터 미쳐있던 걸까. 죽을 때까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영원히 오지 않을 고도만을 기다리는 삶은 가히 미친 삶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고전 "고도를 기다리며"는 함축적인 대화를 통해 생의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 사람마다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역량은 분명 다를 테고 많은 것을 읽어낸 사람일수록 그 충격과 여파는 오랜 여운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두 친구의 대화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답답한 인간군상의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 보여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곁에서 그 불안과 외로움을 덜어줄 존재로서 기능하며 내일도 여전히 고도를 기다릴 어리석은 두 친구의 모습이 그저 어리석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을 벗어날 용기를 택할 수 없다면 함께 고도를 기다릴 어리석은 벗을 찾아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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