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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싯다르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by 정 호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보다 나은 삶이란 무엇인가 고민하는 사람들, 사색하는 사람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 몸 담았던 곳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아가려는 사람들, 스스로의 답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인상 깊게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 의 주인공 싯다르타가 보여주는 삶은 구도자의 삶이며 그것은 신적 존재라기보다는 어쩌면 고뇌하는 우리 인간의 형상과 몹시 닮아 있기 때문이다. 헤세에 대해 조금 찾아보니 헤세는 소설 속 주인공들을 통해 인간의 정신적인 성장, 모순되는 세계의 본질 등을 자주 다루고 있다고 한다. 버지는 목사, 외삼촌은 불교 연구가, 외조부는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했다고 하며 그 역시 가풍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1년 만에 중퇴하며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가 다양한 종교적 지식을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 되었을 테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을 괴롭게 만든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헤세는 싯다르타에서 끊임없이 이런 모순적 상황, 일치되지 않는 세계의 구조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고전이 그렇지만 헤세의 문학은 그의 종교적 지식에 힘입어 종교와 철학을 바탕으로 삶의 진리에 대해 더욱 밀도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서 사색하는 자들, 진리가 무엇인지 탐닉하는 자들, 일종의 구도자적 태도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헤세의 문학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마 전 읽었던 "고도를 기다리며"가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찬 두 주인공의 대사 통해 독자로 하여금 삶의 목적, 다시 말해 우리는 '왜 사는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게 만들었다면 "싯다르타"는 촘촘한 설명과 광대한 철학적 종교적 사색을 대신해 줌으로써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도록 강제한다. 그러고 보니 두 책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궁금증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길 수밖에 없겠다.


싯다르타는, 사문들 가운데 최연장자의 가르침을 받아, 새로운 사문의 규칙들에 따라서, 자기 초탈 수련을 하였으며 침잠 수련을 하였다. 왜가리 한 마리가 대나무 숲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왜가리를 자신의 영혼 속에 맞아들여서 스스로 한 마리의 왜가리가 되어 숲과 산 위를 날아올랐으며, 물고기들을 잡아먹었으며, 왜가리가 겪는 배고픔을 겪었으며, 왜가리가 내는 울음소리를 내었으며, 왜가리가 겪는 것 같은 죽음을 겪었다. 싯다르타의 영혼은 죽은 자칼의 시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죽은 자칼이 되어... <중략> 하이에나들에게 갈거리 찢기고 콘도르들에게 뜯겨 껍질이 벗겨지고 뼈다귀만 남았다가 먼지가 되어 들판으로 흩날려 버렸다. 그런 다음 싯다르타의 영혼이 다시 돌아왔는데, 그것은 이미 한 번 죽어서 썩어 없어져 보고 먼지가 되어 흩날려 본 적이 있으며 윤회의 슬픈 황홀경을 맛본 터인지라. - 싯다르타 31p


깊은 공감, 공감을 넘어선 완벽한 일체감. 타인의 삶에 밀착해 본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수한 삶의 파편을 들여다본 사람은 자신의 삶 역시 그 파편들 중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 사람의 자아는 비대해질 수 없다. 어디에나 널려있는 흔하디 흔한 한 조각의 생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그만큼 외로운 사람은 없었다. 귀족 치고 귀족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직공치고 다른 직공과 어울려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피난처를 찾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바라문도 바라문의 무리에 속하여 더불어 생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어떤 고행자도 사문 계층에서 피난처를 찾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중략> 그렇지만 싯다르타 그는 어디에 속해 있을까. 그는 누구와 더불어 같은 생활을 할 것인가. 그는 누가 쓰는 언어와 같은 언어를 쓰게 될 것인가? 예전보다 자아를 더욱 단단하게 응집시킨 채 싯다르타는 불쑥 일어났다.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의 마지막 전율, 탄생의 마지막 경련이었다. - 싯다르타 66p


완벽한 단절감. 기존의 모든 연결고리들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개체가 되었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처절하게 깨닫게 될 때 찾아오는 절절한 고독감. 하지만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자아에 온전히 몰두하게 된다. 자기를 둘러싼 주위의 세계가 녹아 없어져 완벽히 혼자가 되었을 때, 누군가의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며 스스로 깨우침을 얻고자 할 때, 그제야 우리는 어른이 된다. 고타마의 완벽한 설법을 들은 뒤 싯다르타는 오히려 자신만의 길을 걷기로, 자기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기로 결심하며 깨달음을 얻는다. 그 어떤 경전의 가르침도, 아무리 훌륭한 고행자의 가르침도 받지 말고 자신에게 배우고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기로 그렇게 완전한 침잠의 세계로 싯다르타는 진입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저는 사색할 줄 압니다. 저는 기다릴 줄 압니다. 저는 단식할 줄 압니다."
"그게 전부인 가요?"
"저는 그게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 싯다르타 97p


사색과 기다림과 단식을 자신이 할 줄 아는 유일한 것이자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 말하는 싯다르타. 생업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바라문(브라만)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토록 태연하고도 당당하게 고작 사색과 기다림과 단식을 자신의 능력이라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그저 배부른 자의 신선놀음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단순히 유희를 즐기려는 부잣집 도련님의 허세놀음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사색과 기다림 그리고 단식할 수 있는 능력은 지향점이 분명한 인간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삶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사색하는 사람은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 사색에 도달할 시간이 필요하고 사색에 몰입할 시간이 필요하며 사색이 실현될 때까지 그 막막한 공허의 기간을 버텨낼 시간이 필요하다. 그 모든 것은 기다림이다. 그리하여 사색하는 인간은 반드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사색만 할 줄 알고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은 한 바가지 퍼낸 물로 목욕을 하려 준비하는 옹색한 철부지 아이에 불과한 탓이다. 사색하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마침내 단식을 해내야 한다. 단식이란 욕망을 소거하거나 최소화해 내는 능력이다. 사색과 기다림은 자연스레 진함을 요구한다. 재물과 기력이 쇠해감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색의 전 과정을 기어코 기다려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식(욕망소거) 투쟁의 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것은 수행이며 고행이다. 범인은 가히 해낼 수 없는 것, 싯다르타는 지금 그것을 할 줄 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싯다르타도 삶의 덫에 너무도 쉽게 빠져버리고 만다.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수행을 하다가 더 큰 깨달음을 위해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집을 떠나 사문이 되고, 사문으로서 수행을 하다가 다시 한번 몸담고 있던 사문들과 작별을 고하며 고빈다와 둘이서 수행길에 올라 현존하는 최고의 해탈자 고타마를 만나게 되며 완벽한 진리란 결국 나를 들여다보며 온전한 단독자로 바로서야 함을 깨닫게 된 싯다르타는 그간 함께해 온 고빈다와도 작별을 고한다. 그렇게 완벽히 혼자가 된 싯다르타는 카말라를 만나 세속의 삶을 접하고 배운다. 사색과 기다림, 단식이 삶의 전부였던 싯다르타는 처음에는 부와 명예와 권력과 같은 온갖 세속적 욕망을 그저 놀잇감처럼 바라보며 접근하지만 종국에 가서는 결국 그것들에 잡아먹히고 만다. 그가 그토록 경멸했던 세속적인 존재들과 같아진 자신을 인식하며 싯다르타는 다시 한번 자신이 몸담았던 곳을 등 뒤로 하고 떠난다.


어느 강가에서 뱃사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바주데바와 오랜 세월 함께하며 강과 바주 데바를 통해 자신만의 종교적, 철학적 해답을 찾아가던 싯다르타는 그렇게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세존 고타마가 곧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부처가 열반의 세계로 입적하려 하는 그곳을 향해 순례길에 나선다. 카말라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는 아들과 함께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카말라는 뱀에 물려 위독해지고 우연히 싯다르타와 조우한다. 하지만 카말라는 곧 생을 다하게 되고 그녀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싯다르타의 아들이었던 남자아이를 싯다르타는 선물처럼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의 시작이었으니 소년은 고집과 변덕을 부렸고 반항을 하였으며 싯다르타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반면 싯다르타는 강요하지 않았고 벌주지 않았으며 사랑을 전하려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젊은 시절 카말라와 함께 지낼 때 느꼈던 부와 권력, 명예를 갈망하는 욕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종류의 번뇌와 맞닥뜨린다. 아이는 결국 싯다르타가 모아둔 얼마 안 되는 재물을 들고 달아나고 만다. 싯다르타는 아이를 혼내기 위해서가 아닌,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닌, 오직 아들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이의 뒤를 쫓지만 아이가 있다고 예상되는 도시에 들어서며 그 옛날 카말라의 소유였던 정원 입구에서 두 발을 멈추게 된다. 그곳에 서서 그는 과거 자신이 바라문의 아들이었던 시절을, 사문이었던 시절을, 카말라와 유희를 즐기던 시절을, 카마스와미와 함께 욕망을 추구하던 시절을 떠올린다. 그 직후 새장에 갇혀 있던 카말라의 새를, 윤회를 온몸으로 느끼며 욕망의 허망함을, 아들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이 아들에게 집착하고 있음을 느끼며 구토감을 느낀다. 그리고 천천히, 그는 모든 목적의식이 사라짐을 느끼며 공허함을 느낀다. 그는 침참에 들어선다. 그는 그저 듣고, 기다리며 공의 상태에 빠져들어 간다. 그렇게 응고된 무감각 상태로 접어들며 오롯이 자신에게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젊은 시절 깨달음에 한 발짝 다가선다.


싯다르타는 강을 매개 삼아 많은 것을 깨닫는다. 강은 모든 것을 비추는 존재이기에 그의 과거와 현재, 그가 만나온 사람들과 그가 겪어온 고통들을 거울처럼 비추며 보여준다. 강은 언제나 흐르고 있어서 물질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한 순간도 동일하지 않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인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인간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삶 또한 끊임없이 내면과 외면이 변해가지만 외부에서 보기에 그것은 언제나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강은 인간이요, 강은 삶이며, 강은 계시적인 존재다. 이것은 깨달음은 결국 내 안에 있다는 불교적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강은 신적 존재이자 동시에 나 자신이다. 내가 부처가 되는 과정은 그렇게 강을 들여다보며 진행되고 강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나는 곧 부처와 하나가 된다. 그것은 인간과 신의 병합이자 열반으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삶을 진지하게 마주 보려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반드시 읽어봐야 될 책인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헤세는 싯다르타를 통해 우리에게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을 선명히 보여주려는 작업을 해낸 것인지도 모른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이 깨달음을 나는 일생에 꼭 한 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 시도가 바로 싯다르타다"라는 헤세의 말은 그래서 귀담아들을만하다. 결국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것. 내 안에 부처가 있다는 불교적 가르침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음을 헤세는 자신의 문학을 통해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세계관이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그의 귀한 통찰과 념을 조금이나마 주워 담기 위해 그의 또 다른 작품들을 가까운 시일 내에 접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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