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내내 미궁을 헤매는 느낌을 받는다. 개연성이 전혀 없고, 알 수 없는 상징들과 변칙적인 장면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으로 하여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그래서 영화 속 상징이나 등장인물들의 관계성, 대사의 의미를 곱씹을 여유를 주지 않는다. 영화를 다 본 뒤 다시 떠올려봐도 비주얼적으로 화려한 어떤 장면들, 부드러운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처럼 파편적인 이미지만 머릿속에 맴돌 뿐 의미를 유추할만한 장면이 연속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거장의 세계를 이해하기에 아득히 부족한 것일까. 그저 기억에 남는 것을 붙잡아 무어라도 써보려 하니 떠오르는 것은 "완벽함"에 대한 어떤 막연한 느낌뿐이다.
일단 자전거에 올라탄 순간 멈춰 서 있을 수 없다. 쓰러지거나 계속 달리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사상과 과학, 세계와 인간 역시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 멈춤을 선택하는 순간 새로운 어떤 존재에 의해 대체되어버리고 만다. 끊임없이 밀고 나가는 일, 새로운 것에 자리를 내어주는 일, 둘 다 허무하리만치 고된 일이다. 그러나 그 고된 일을 벌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보충에 보충을 거듭하며 완벽에 가까워지려 애쓰지만 완벽함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마도 어떤 종류의 완벽함을 추구하며 살아왔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을 인식하고 무기력을 느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하야오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가들이 겪는 공통의 감정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깨달음을 갈구하며 구도자의 길을 걸어가는 철학자나 종교인, 또는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종류의 직업인들 역시 공통으로 겪는 감정이다.
건축이나 인테리어를 하는 사람들은 미학적, 실용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어떤 구조물이나 공간을 끊임없이 연구한다. 의료인 역시 질병이나 상해로 고통받는 환자에게 최선의 처치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교사들은 아이들을 지식적, 인격적으로 잘 길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교수법과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 헤맨다. 요리사는 또 어떤가, 요리를 주제로 하는 여러 프로그램을 보며 요리사들이 최상의 맛을 내기 위해 아주 미세한 영역을 컨트롤하기 위해 온 감각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 역시 완벽을 추구하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완벽에는 결국 도달하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 애초에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기 때문이다. 하여 인간은 인간이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두려움과 선망을 구체화해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 것 아닌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주인공 마히토(후계자, 대체자)와 큰할아버지(신 또는 현존하는 완벽에 가장 가까워진 최종 모델)라는 존재를 설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마히토도 큰할아버지도 하야오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해석이 많다. 거장의 반열에 올라 새로운 후계자를 기다리는 현재의 마음을 큰할아버지라는 인물에 빗대고 어린 시절의 다양한 상처와 양가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마히토라는 어린이를 설정한 듯 보인다. 하야오의 가정적 배경과 그가 살아온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한 인간의 일대기를 스스로 정리하려 했다는 측면에서 예술가의 삶의 여정을 녹인 한 권의 자서전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야오는 인간이란 불완전하지만 결국 끊임없이 나아가야만 하는 존재라는 답을 내놓은 것 같다. 내가 구축한 세계를 물려받아 안정적으로 꾸려가라는 큰할아버지의 제안은 상업 예술가로서는 퍽이나 구미에 당기는 제안임이 분명하다. 하야오 역시 그간 성공가도를 달려오며 자신만의 애니메이션 세계를 구축해 냈으므로 분명 어떤 방식으로 제작하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지 감각적으로 터득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큰할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고 마히토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자신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그것이 하야오가 이번 작품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결국 인간이 삶을 대해야 하는 태도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하야오의 삶과 작품이지만 결국 그러한 방식으로 밖에 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완벽하지 않지만 완벽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자 최선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 어느 누가 동의하지 않을 것인가.
진격의 거인에서 에렌이 처참한 결말을 알면서도 그것이 그나마 최선의 결과임을 예견하고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에반게리온에서 신지가 인류의 리셋과 리스타트를 사이에 두고 다시 시작하는 것을 선택했던 것처럼 불완전함과 그로 인한 갈등이 결코 끝나지 않을 자연적,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그러한 불완전한 결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데 여러 예술가들이 동의하고 있음을 뜻한다. 최근에 코스모스를 읽으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현재 인류가 도달한 수준보다 조금 더 완벽에 가 닿으려는 수학자, 과학자들의 발버둥을 활자로 읽어나가며 작지만 위대한 한 점을 찍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빚어내는 위대함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느낀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지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중에게 그 고민을 함께 제안했듯,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평생에 걸쳐온 고민을 이번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물었다.
여러 등장인물과 시대적 배경, 부족한 개연성에 의해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분명 누군가는 각자의 생각을 발현시키는 데 도움이 될만한 영감을 얻는다. 나 또한 영화를 보는 내내 이해되지 않는 장면들로 인해 의아하기도 졸음이 쏟아지기도 하며 영화를 제대로 감상해내지 못하고 영화를 본 뒤 여러 후기와 감상평들을 찾아보며 꾸역꾸역 의미를 끼워 맞추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 역시 불완전한 세계가 조금 덜 불완전한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하야오의 의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결국 각자의 답을 만들어가며 그것을 타인과 나누며 살아가게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