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재미있는 교양서
시간이 없는 현대인에게 핵심적인 정보만 정리해서 제공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책의 서문에 적어두었듯 저자 톰 버틀러 보던은 50명의 철학자에 대해 간략하지만 핵심적인 정보를 기술한다. 옥스퍼드대학교 도서관에서 책의 원고를 썼다는 그는 철학에 대해 생각하고 연구하고 글을 쓰다 보면 일상과 동떨어진 느낌이 든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철학이 개인의 삶과 사회를 개선하는데 분명 기여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며 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단순히 철학자들의 사변적인 사고를 따라가는 것에 빠져 재미를 느끼고 지적 허영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닌 진짜 내 삶과 연관된 어느 지점을 발견할 때, 그것이 내 삶을 설명하고 막히거나 고민했던 지점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철학하는 즐거움은 배가된다. 그런 의미를 되새기며 누가 어떤 사상을 주장했고 어떤 개념을 고안했고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암기하며 공부하듯이 읽지 않고 내 삶과 맞닿아 있는 철학이 어느 것인지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어보기로 했다.
하이데거의 용어 중 '양심'이란 도덕적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성찰의 길을 걸으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라고 일깨우는 것이다. '결단성'이란 대중적인 관습과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 흡수당하지 않고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기로 분명히 결정하는 것이다. 226p
하이데거의 용어, 양심과 결단성에 따라 살려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주류의 흐름이라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대세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올바른 결정이라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패러다임이 점차 희석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유행이나 트렌드라는 이름으로 경제분야에서는 대중의 시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개인의 삶과 행복, 삶의 전반적인 방향성에 있어서는 분명 개별성이 더 강조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양심과 결단성을 발휘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불안과 체면 때문이다. '독자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언제나 외로운 길인 탓이다.
인간의 의식을 분석한 결과, 흄은 '나'가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우리는 단순히 관념의 묶음이고 우리의 정신은 무대와 장면이 매 순간 바뀌는 극장과도 같다. 233p
이런 생각은 유용하다. 해탈을 위한 무아 수련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생각이 강해진다. 나이를 먹을수록 아집이 강해진다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반대다. 어린 시절 오히려 자아과잉으로 모든 것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고 나이를 먹어가며 내 고유의 것이라는 것이 사실은 무에 가깝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하는 생각, 말, 행동, 내가 겪은 경험, 나를 둘러싼 환경, 이런 모든 것들이 종합돼서 발현되는 나라는 존재는 그다지 고유하지도 않다.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인풋을 받아들이고 비슷한 아웃풋을 발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분포해 있다. 나만의 고유성을 발휘한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기 위해 애쓰며 살지만 사실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 그저 운 좋게 자신의 개별성에 공명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인간은 자신의 독창성을 인정받았다며 기뻐할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공명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은 나와 비슷한 사람이 그만큼 많이 있었다는 뜻이니 사실 대중성을 얻는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창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의 반증이 될 수도 있다.
제임스는 기질에 따라 유리한 철학적 사유를 택하거나 옹호한다고 주장했다. 기질이 딱딱하면 구체적 사실을(경험론), 무르면 추상적 원리를(합리론) 추구하게 되며 철학의 역사는 기질 간 충돌의 역사에 불과하다. 241p
종교적 체험이라는 말을 처음 도입하고 미국에 심리학과를 제일 처음 도입한 19세기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인류 이성의 총체인 철학조차 그저 인간들이 자기 기질에 따라 개인적 편견에서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누구의 철학이 옳은 것일까, 어떤 것이 진리에 가까울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명쾌한 해답이 아닐까. 천재라고 여겨지는 철학자들조차 결국 기질과 편견에 종속된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라는 의견은 위로와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몽테뉴는 사색과 글쓰기로 자신을 탐구하였으며 시도라는 의미의 에세이라는 단어를 자기 책의 제목으로 사용했다. 몽테뉴는 자전적 성격이 강한 이 책이 자기 미화로 치닫지 않도록 노력한다. 몽테뉴는 자신이 쓴 어떤 글도 흡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호평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는 잡담에 끔찍이 서툴렀고 연설이나 주장도 잘 못했다. 그는 스스로를 극도로 게으르고 멋대로이며 기억력이 나쁘다고 평한다. 그러나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면서도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이상, 나는 내 할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늘 확신이 없어 다른 사람이 확실성과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몽테뉴는 책략을 짜고 거짓말을 일삼으며 남에게 아첨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심중을 그대로 드러내는 요령 없고 따분한 사람이 되는 편을 선호했다. <수상록>은 자아의 덧없고 변덕스러운 속성을 환기시킨다. 몽테뉴는 또한 "우리는 악의보다도 무위로 가득 차 있다"라고 말했다. 350-359p
몽테뉴의 생각에 완전히 동의하고 인간적 특성에 눈길이 갔다. 에세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사람답달까.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기 안의 것들로 철학을 했던 몽테뉴의 인간적 특성은 어쩐지 에세이를 쓰는 사람의 전형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에세이를 쓰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지는 않을 테지만 어쩐지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았기에 몽테뉴에 관한 부분을 읽으며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글쓰기가 자기 합리화나 자기 미화, 자기기만이나 자기 연민으로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써도 써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 그럼에도 끝까지 자기 안의 모든 것을 써내보겠다는 다짐. 에세이를 쓰는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가질만한 감정들을 에세이의 창시자 또한 느꼈다니 같은 장르의 일을 하면 결국 비슷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이치인 모양이다.
니체는 철학자들은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이라 일갈했다. 이는 인간이란 본디 자신의 힘을 표출하기 위해 살아가는 힘에의 의지에 종속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니체는 인간이 스스로 믿는 것보다 훨씬 더 적게 생각하며 철학자들은 그저 편견의 옹호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런 생각은 앞서 말한 윌리엄 제임스와 겹치는 부분이다.
자신에 대한 관심은 어떤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어지기 힘들다. 기껏 해야 일기 쓰기에 매달린다거나 정신 분석을 받으러 다닌다거나, 승려가 되거나 할 뿐이다. 431p
버드런트 러셀이 <행복의 정복>에서 언급한 행복 처방전이 인상 깊다. 러셀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면 일기 쓰기나 정신 분석을 받으러 다니거나 승려가 될 뿐이라는 러셀의 통찰이 놀랍다. 글을 쓰면 쓸수록 자신의 내면세계에 빠지게 되고 그것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과정이며 그 과정이 더 풍부하고 깊은 글을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러셀의 말처럼 글을 쓰며 자의식과 너무 자주 마주하다 보니 괴로워지는 지점이 생기기도 한다. 정신 분석을 받고 싶다거나 승려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서 러셀에게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라는 개념을 사용했는데 이는 끊임없이 배출구를 찾는 일종의 에너지를 뜻한다. 의지는 결핍에서 비롯되며 기질의 표현이고 우리는 기질에 맞지 않는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의 의지는 개인의 결핍에서 발생하는 기질의 필연적 발산이다. 그래서 개인이 지나치게 자신을 믿다 보면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착각 속에서 살게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철학자들 간의 개념이 서로 맞닿아 있는 부분을 발견할 때면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쾌감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인간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깨달아간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러셀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또 하나의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룬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들 중 일부가 부족한 상태여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권태로부터 한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상태이며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설정한 셈이다. 또한 권태를 행복에 치명적인 위협으로 바라보았으며 어느 정도의 권태를 견딜 수 있는 힘이 행복의 세 번째 조건이라 말한다. 내일이면 마흔을 앞둔 시점에 러셀의 주장은 크게 공감이 된다.
나심 탈레브의 사상과 '블랙 스완'에 크게 공감했다. 블랙 스완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나타나는 사건을 뜻한다. 그런데 사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검증할 수 없으며 오직 이례적인 상황 속에서만 사건이나 사람의 본질이 드러날 때가 많다. 우리는 과거에서 배운다는 말에 익숙하다. 역사 공부를 하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가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한다는 나심의 주장은 파괴적이다. 낯설지만 강력하게 동감하기 때문이다.
탈레스, 피타고라스, 프로타고라스, 소크라테스로 시작하는 연대기적 교양 철학서만 읽어왔던 터라 이름 순으로 배열했다는 세계 철학 필독서 50은 몰랐던 철학자들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어 신선했고 기존에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철학자들의 출생이나 가정환경 등 환경적 배경을 짤막하게 서술해 둔 덕에 철학자의 이론이 태동하게 된 연관성을 추론해 볼 수 있어 재미있었다. 철학 교양서를 몇 권쯤 읽어봤다면 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