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드(중국드라마)에 빠지게 된 시점을
정확히 기억한다.
바로 몇 년 전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였다.
이미 건강이 심각하게 나빴던 엄마는 위암을 얻으면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말았다. 하루하루 몸이 나빠지는데도 엄마와 난 서로 죽음에 대한 얘길 꺼내질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못했다.
그 단어를 입밖에 꺼내는 순간, 죽음의 신이 엄마를 데려가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에.
그러거나 말거나 죽음의 신은 인정사정도 없이 엄마를 데려가버렸다.
난 그저 정신없이 슬펐다... 화도 났었고.
코로나격리 때문에, 사는 지역이 멀다는 핑계로 임종도 지키지 못했고, 유언도 듣지 못했다.
강한 게 아니라 '척'하는 나 같은 사람은 이럴 때 너무 힘들다. 사람들 앞에서 질질 짜는 것도 싫고, 괜찮은 척하고 싶었다. 내겐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으니까.
빨리 마음을 회복하고 싶었고, 마음 가는 대로 해봤던 것 중에 도움이 된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무작정 걷고 뛰기.
운동화만 있으면 되니까 누구나 부담 없이 시도해 볼 수 있다. 마음의 슬픔, 화가 발로 다져진 것처럼 차츰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이유'가 부르는 '좋은 날'이 내 슬픔과 대조되어 그렇게 애절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는데.
다른 하나는, 중국드라마를 보는 거였다.
너무 뜬금없다고?
동양고전소설을 논할 때 삼국지, 초한지 같은 대하사극부터 판타지모험활극인 서유기, 무협의 대가 김용의 무협소설까지, 중국작품들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다.
나도 알게 모르게 꽤 읽어왔었고, 삼국지를 끝까지 읽으면서 흘렸던 눈물과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서양판타지보다 동양판타지는 우리 정서에도 잘 맞았다. 효, 예절, 정을 중시하고, 제사를 올리는 유교나 도교적 세계관이 그러했다.
무엇보다 판타지사극 속 신들의 몇 만년 긴 인생을 보면서 짧은 생을 사는 우리 인간의 생사에 초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죽은 자가 윤회 전에 이르는 망천강을 건너는 에피소드들도 흥미롭지만 윤회를 한 두 번도 아니고 아홉 번이나! (스케일 보소) 하면서도 같은 여인을 사랑하는 '유리미인살' 같은 드라마를 보면 죽음이란 잠시 이별하는 것뿐이란 마음의 초연함이 저절로 생겨났다.
자연스럽게 중드의 '선협물'이라는 장르에 꽂히게 됐는데.
선협물이란 동양판타지로 도교적 세계관을 베이스로 한 것이 많다.
요즘은 인기 웹소설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들이 연달아 히트를 치고 있고, 무협의 '협'보다 남녀의 '정'을 다룬 히트작이 더 많다는 게 지적되기도 한다.
몇 만년씩 사는 신들이 그리스비극처럼 인간보다 더 인간처럼 사랑 같은 감정에 목매는 이야기는 솔직히 봐도 봐도 재밌지 않나.
중드 분량이 50회 정도는 기본이라
감정을 더 깊고 길게 느낄 수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물론 많은 분량 때문에 '현생망'(현실생은 망함)할 수 있음을 주의!
그렇게 보게 된 중드는 2년도 안 된 사이에 서른 편을 넘어섰다. 선협물은 물론 궁중암투극, 우울함을 날려주는 청춘로맨스물로 장르가 넓어지는 동시에 한정되었다.
그동안 점점 죽음과 이별에 초연해졌고, 드라마를 보면서 흘린 눈물도 카타르시스에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나를 위로해 주었던 중드를 잘 알진 못해도 나만의 관점으로 소개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