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홍 Dec 09. 2024

18화 반격의 서막(4)



“주제를 몰라. 막내 주제에 할 말 다 하고 눈치 안 보는 게 뭐 요즘 애들 미덕이니? 사회생활은 아부도 하고 눈치도 보면서 크는 거야. 주제에 감히 주연급 배우한테 헛소릴 늘어놔?”

“또 무슨 일이에요?!” 

     

외근 갔다 온 현팀장이 우리를 보고 인상 찌푸렸다. 나와 오PD는 서로를 노려보느라 현팀장의 말이 잘 들리지도 않았는데.       


“넌 직원을 대체 뭘 보고 뽑았니? 시골에서 올라온 이런 몰상식한 애를...” 

“오PD님!”      


현팀장이 소리치는데, 화가 나는 걸 일단 참았다.  


“PD님, 배우가 작품 마음에 안들면 깔 수도 있는 거지, 왜 저한테 화풀이세요?”

“뭐야??”

“PD님 말마따나 난 영화사 막내고 상대는 탑배운데 내가 말한다고 들을까요?”     


꾹꾹 눌러 담아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순간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오PD는 윽박지르듯     


“사회생활엔 선이 있단 얘길 하는 거야. 영어로는 레벨! 주제를 알란 말야!”       


하고 말했다.      


“장대표님한테 막말하는 PD님이 할 소린 아니죠.”     


현팀장도 참다못해 한마디 하자 뚜껑이 열려버리는 오PD.     


“야! 팀장이 제대로 훈계는 못할 망정...”     


이때 흥분한 목소리가 날라와 살벌한 분위기를 한 방에 깨버렸다.     


“’시네마펀치‘에서 <더 키친> 관심 있다면서요?! 진짜죠!” 


홍감독 혼자 흥분한 얼굴로 뛰어 들어와 소리쳤다.


“와, 주연을 누구로 하지? 대표님은 누구로 생각한대요?”      


우리 셋은 씩씩거리면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썰렁한 분위기를 그제야 눈치챈 홍감독이 어리둥절해하는데. 오PD가 홍보실을 나가면서 입구에 선 홍감독을 기분 나쁜 듯 치고 나간다.      


“왜 저래...?” 

“괜히 화풀이하는 거죠.”      


한두 번이 아니었던 듯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현팀장. 홍감독은 기분 상한 듯 오PD의 뒷모습을 노려본다. 이때 심실장도 흥분한 얼굴로 들어오는데.      


“<더 키친>에 투자사가 관심 보인다면서요? 야, 미래씨가 시나리오 좋다고 그렇게 난리치더니... 감독님,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미래씨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죠.” 

“네? 힘도 없는 제가 무슨... ”     


쑥스러워 몸 둘 바 몰라 손사래를 쳤다. 이때 장대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영화사에 울려 퍼졌다.      


“심실장 있어? 심실장--!!”

“네? 네에---!!”      


심실장이 깜짝 놀라 허둥지둥 대표실 쪽으로 뛰어갔다. 


“품위 없이 저렇게 소릴 지르냐...”     


현팀장이 한숨을 쉬었다. 이후로 모든 일이 정신없이 빠르게 전개되었다. 

심실장은 홍보실을 거쳐 현장에서 몇 년간 구른 고생 끝에 드디어 <더 키친>의 PD로 낙점되었다! 나 때문에 <더 키친>의 시나리오를 오래전에 읽었고 마음에 들어 했었기에 그 작품의 PD가 된 것을 두 배로 기뻐했다.       

<자객>의 시나리오는 또 다른 A급 남자배우들에게 전달되었다. 

한중 합작 영화인데다 카리스마 있는 검객 캐릭터였기에 하겠다는 배우들이 여럿 있었다. 정지우는 자신의 선택을 잠시 후회하기도 했지만 이미 떠나버린 배였다. 지대표의 잔소리 때문에 힘들긴 했지만 새로운 작품을 찾기 위해 시나리오 읽기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목소리 좋은 훈남 배우였던 이병우가 <자객>의 주인공으로 낙점되었다는 뉴스가 인터넷과 TV에 도배되었다. . 


나는 안주연의 멜러 영화 개봉을 앞두고 각종 시사회 진행으로 정신없었다. 진행 중인 작품이 늘어나 우리 팀에도 인력 보충을 하게 되었다. 막내 신세를 벗어나 기뻐하는 것도 잠시, 명문여대를 갓 졸업했다는 그녀는 나보다 더 어리버리하면서도 퇴근 시간 하나는 칼같이 지키려고 해 팀내 분란을 일으켰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 키친>이 잘 진행될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캐스팅이 안된다는 소식에 마음이 어두워졌다. 홍감독이 그 작품으로 입봉을 해야 나도 그동안 성장해 홍감독과 같이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여배우들이 왜 거절하는 거예요?”      


나는 답답한 마음에 심PD와 홍감독에게 물었다. 단골인 충무로의 평양냉면집에서 저녁 겸 술을 마시는 자리였다.      


“여자 두 명이 주인공이니까 나눠 먹어야 되잖아. 그러니까 A급들은 안 하려고 하고...”

“중간급 여배우 두 명을 붙이려니 투자사가 반대해요.”


동시에 한숨 쉬는 심PD와 홍감독 때문에 식당 바닥이 꺼지지나 않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순항 중인 <자객>을 생각하니 불안해졌다. 진짜 오PD와의 내기에서 져서 내가 회사를 나가야 되나?  . 

원래 <더 키친>은 우리 영화사에서 못 들어가고, 다른 회사로 옮긴 후에 힘들게 들어간 작품이었다. 결국 정해진 과거대로 갈 수밖에 없는 건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건지 우울해졌다.     

나도 같이 멍하니 식당 TV의 드라마를 보다가 돌연 한 여배우에게 시선이 꽂혔다. 요즘 인기 많은 사극 드라마의 공동 주연인 그녀는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탔었던, 연기의 신이라고 불리던 여자였다. 나이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이 되었지만 여전히 고혹적인 미모가 돋보였다.      


“저기, 저 여배우 어때요?”     


내가 갑자기 흥분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하자 그쪽을 바라보던 감독이 어리둥절해했다.      


“누구... 설마 성수정요?” 

“오 마이 갓... ”     


심PD도 어이없는 듯 말했다.      


“사극 찍는 한물간 여배우를 우리처럼 트렌디한 영화에? 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홍감독.  


“웬만한 A급 여배우한텐 다 돌렸는데 까였다면서요? 감독님 시나리오 여주인공은 섹스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 캐릭터잖아요. 여배우들은 이미지 나락갈까 봐 노출 꺼리는데 누가 쉽게 하려고 하겠어요? 그것도 신인 감독 작품을.”     


일리 있는 지적이었는지 생각에 잠기는 홍감독.      


“그렇다고 예쁘지만 연기 못하는 신인 여배우를 붙일 수도 없지...”     


라고 홍감독이 말했다.      


“하긴 성수정씨는 진짜 아티스트 아닌가? 작품을 위해 노출 연기는 마다하지 않고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탔었잖아요.”     


심PD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장대표하고도 친분이 있지 않나...?”       


라고 무심코 말을 내뱉은 홍감독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