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거인'을 보면 어느 날 뜬금없이 성벽 위로 거인의 못생긴 대두가 나타납니다. 두두둥.
사람들은 언제 거인이 싹 쓸어버릴지 모를 공포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평화롭게 살아가죠.
뭘 어떻게 해보려 해도 타개할 방법을 알 수 없었기에, 아니면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 두려워 평화로운 척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그러나 결국 두려워하던 일은 일어나고야 맙니다.
얼마 전 아버지에게 거인처럼 폐렴이 진격해 왔습니다. 간단한 감기라 생각하고 방치했던 결과였죠.
세상 어떤 노인보다 건강하다고 자부하셨고,
그렇게 보이던 분이 폐렴으로 장기간 입원한 후 살이 확 빠져 '진짜 노인'이 된 것 같았어요.
아버지는 젊었을 때 씨름을 하셨을 정도로 근육짱짱맨이었습니다.
표정이 근엄한 데다 말수까지 적어서 나타나면 주변에 긴장감이 감돌았죠.
우리가 어릴 때 동네애들은 아버지가 나타나면 다 도망갔어요. 불량할수록 더욱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는데, 터미네이터가 등장할 때와 거의 유사했습니다.
그랬던 아버지가 풍선에 바람이 빠진 것처럼 추욱 마른 모습이라니, 적응이 잘 되지 않습니다.
또한 근엄하고 카리스마 있었던 모습은 어디로 가버리고 잔소리 많은 아줌마가 되셨을까요.
멜론을 왜 그렇게 깎냐, 왜 그렇게 오래 씻냐,
전화는 왜 안 받냐 등등, 성격이 좋지 않은 전 욱해서 말대답하다가 구부정해진 아버지를 보면 안쓰러워 짜증을 삼키게 됩니다.
어릴 땐 말없는 아버지가 불만이었는데, 나이 드시니 말문이 터져버리신 걸까요.
폐렴으로 큰일 날 뻔했다는 담당의사의 말을 듣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생 헬스하고 건강식을 드셨던 분입니다.
운동을 오래 하셔서 내재된 근육 덕분에 퇴원할 수 있게 된 거라는 의사의 말에 다시 한번 운동의 중요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버지처럼 건강하던 분도 순간 무너질 수 있구나 생각하니 아찔하기도 하고요.
깡시골에서 고아나 마찬가지로 자란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대학까지 나와 이뤄낸 아버지의 소우주가 점점 저물어가는 느낌입니다.
남들이 보면 노인이지만 자식들 입장에선 근엄한 나무로만 보였던 아버지의 노화가 걱정스럽습니다.
그것이 인간 모두에게 벌어지는 당연한 섭리임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움에 당황하게 됩니다.
어린이의 유치함은 우리가 지나온 길이고, 노인의 허약함은 우리가 갈길입니다.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일, 내가 너이고, 네 일이 아니라 우리 일입니다. 모두가 같은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죠. 누구는 30킬로, 누구는 70킬로로 달릴 뿐.
모르는 타인, 인류 전체에게 동질감과 측은지심이 느껴지는 순간. 그러니 남들에게 친절하게라도 굴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