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미나,《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최근에 웨이브 정치서바이벌 <더 커뮤니티 : 사상검증구역>을 재밌게 봤다. 좌파인지 우파인지/페미니즘을 지지하는지 반대하는지/upper-middle class 출신인지 working class 출신인지/새로운 문화와 윤리규범에 대해 개방적인지 전통적인 윤리규범 수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의 네 가지 기준으로 MBTI처럼 출연자들에게 코드를 매기고 진행하는 서바이벌. 정말 고자극이다. 개인적으로 호감이 가는 출연자도 있었고 비호감인 출연자도 있었는데 그게 출연자 각각의 사상코드랑은 무관했어서 재밌었다.
출연자 중 한 명인 '하마'의 저서 <미쳐있고 괴상하고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마침 밀리에서 읽다가 중단했던 상태였는데 <더 커뮤니티>를 계기로 이번에 마저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의 어떤 점이 힘들어서 읽기를 중단했는지 다시 한번 떠올렸다.
미쳐있고 괴상하고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이라. 사회가 이 여자들을 미치게 만들었고, 그래서 이들은 괴상하게 보이지만, 동시에 자기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자 부단히 노력하기 때문에 오만하고 똑똑하다는 의미일까. 아무튼 내용을 읽어보면 여성환자의 정신병은 엄살로 치부되거나 여성호르몬의 문제로 여겨져 온 역사가 있고, 진단명으로 이들이 겪는 다층적인 고통을 획일화할 수는 없으나, 다만 가족과 연애와 사회(가난, 성희롱) 등 이들의 질병 서사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유사한 배경이 있었으며, 그러므로 이들의 질병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 같았다.
이야기의 궤가 좀 듬성듬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이들이 꺼내놓은 내밀한 이야기가 어떤 뚜렷한 방향성을 가진 해석으로 연결된다기보다 뭔가 두루뭉술한 주제로 엮인 불행포르노 같다고도 느꼈고, 적어도 이 책에 등장한 인터뷰이들의 질병 서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배경은 이들이 여성이라는 점보다는 이들 또는 가족에게 돈이 없었거나 안정된 직업이 없었거나 가정폭력이 있었다는 점이라서 이 이야기들이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존재들에게서 특유하게 나타나는 우울의 양상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것인지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결코 개개인의 이야기가 사소하거나 귀 기울일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옛날과는 달리 타인의 고유한 체험과 경험에 뭔가 최소한의 실증적 근거 없이 그럴듯하고 거대한 사회적인 의미를 임의로 부여하는 글쓰기 방식에는 감동하기보다는 일말의 의구심을 갖게 된다.
특히 항우울제를 복용하거나 운동을 하고 상담을 받고 글쓰기 수업을 듣는 등의 개인적인 노력보다 정치에 참여하거나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를 꾸리는 것에 더 가치를 부여하는 뉘앙스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한창 페미니즘이 매일매일 세간의 화제였던 201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다. SNS에는 끝없이 누가 성폭력을 당했고 욕을 먹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이 끝없이 올라왔고 사람들은 편을 갈라 죽자고 실시간으로 싸웠다. 그걸 매시간 들여다보고 있자면 슬픔과 분노를 주체 못 할 것 같은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 시절을 통과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자기 앞가림도 안되면서 추상적인 불의에 대한 저항과 타인의 고통에 과몰입하는 데 인생의 에너지를 모두 쏟는 태도는 잘해야 대학생 때 정도까지나 긍휼히 여겨줄 수 있다는 것이다.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그대로 나이를 먹게 되면 타인의 고통과 불의 그 자체를 해결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됨은 물론이고, 스스로 생활과 건강을 지탱할 능력은 없는데 자의식만 비대해져서 가까운 누군가의 삶에 그늘을 드리우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받고 있는 차별과 고통에 깊이 감응하다가 우울에 빠진 나<를 너무 깊이 사랑하면서 우울을 낭만화하는 함정을 조심해야 한다. 같이 비를 맞으면서 얼싸안고 통곡하는 시간도 가끔 필요할 수 있지만 언젠가는 정신 바짝 차리고 스스로 진짜 효과적으로 비를 안 맞거나 덜 맞는 법을 찾아야 한다.
또한 어떤 담론에 대해서 생각이 얼추 비슷한 사람끼리 모아놨다고 다 같은 싸움을 하는 게 아니고, 아무리 서로 상처 주지 않으려고 애쓰고 정치적 올바름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는 말랑한 과일 같은 사람들끼리 모아놔도 이리저리 움직이고 부딪히면 멍들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작가도 페미당당이라는 공동체에서의 경험을 다소 복잡한 심경으로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자의식이 강하고 예민하며 정신적으로도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의 우울을 치유하고 구원의 선순환을 이루는 돌봄 공동체를 건설하자는 이상은 결과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과정적으로도 위험한 시도라고 생각했다. 우울과 고통을 매개로 너무나 끈끈하게 연결된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나는 이제 건강해졌으니까 가볼게,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하겠냐고.
순진하고 섬세하고 예민하고 연약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도 일말의 비빌 언덕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특권이고, 그래서 돌봄과 공동체는 보편적인 치유의 수단이 될 수는 없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만약 운좋게도 친구나 연인, 가족이나 배우자 같은 비빌 언덕이 있다 해도 그들의 돌봄에 자신의 생존과 치유를 의지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소중한 타인에게도 다소 무책임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너무 허기졌어요. 당신과 함께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지만 당신은 너무 허기졌어요. 그 여행은 할 수 없어요. 그건 당신의 여행, 오로지 당신 혼자만의 여행이에요. 우리의 여행이 될 수 없어요. 그녀가 옳았다. 타인을 자기 삶의 건축용 석재로, 자기 구원의 경주를 위한 일벌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파스칼 메르시에, <리스본행 야간열차>
과거에는 밑바닥까지 솔직하게 까뒤집어 보여주는 것이 일종의 진실한 교감의 요청이라고 믿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자신도 아직 받아들이고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자기 모습은 날것으로 보여주기보다 스스로 해석하고 정리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먼저 거치는 게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 대한 예의이고, 밑바닥을 보여주면서 나 이런데 이래도 사랑하냐고 시험하거나 이래도 사랑받는다는 데서 안심을 얻고 감사를 느끼는 데서 멈추는 것은 소중한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도움과 돌봄과 호의는 당연하게 얻어지는 게 아니다. 본질적으로 모든 관계는 호혜적이지 않으면 평등해질 수 없다. 그런데 받는데 너무 익숙해지면 주지 않는 타인을 터무니없이 원망하게 된다. 그리고 배려를 맡겨놓았던 것처럼 받으려고 하는 태도는 사람을 참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더 커뮤니티>에서 '하마'에게 상금을 양보했지만 호감도를 받지 못했던 '다크나이트'가 그에 대해서 했던 '받는 게 익숙한 사람이다'라는 평가의 의미와 '백곰'이 탈락면제권을 자신에게 쓰지 않아 결국 탈락했을 때 '하마'가 환멸과 배신감을 표현했던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우울을 겪었고, 그만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계획을 주치의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제대로 말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가까운 사람의 인생에는 무게를 더하고 싶지 않았고,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 약점을 알려주면서 칼자루를 쥐어주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어떤 도움과 돌봄도 절대적이고 영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설령 그런 게 가능하더라도 그것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죽음의 실행 이전에 나를 살리기 위한 모든 시도를 해보지 않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서 정말로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고, 여전히 건강한 삶을 위해서 끈기 있게 애썼다는 흔적은 계속해서 남기고 있다. 그래야 언젠가 정말 끝내야 할 때가 오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래도 가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남길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각자의 상황과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두께와 투명도와 색깔의 우울을 통과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상태가 앞으로 얼마나 길게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어떻게든 계속해서 앞날을 제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원한 불편으로 남은 과거의 서사에 중독되어 그것을 영원한 불행으로 만드는 함정에 빠지지는 말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