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산책

by 산책자 C

회사에 다닐 때는 빠르게 점심을 먹고 남은 시간에 산책을 했다. 하지만 점심시간 전후로 엘베 대란이 벌어지는 회사에서는 1시간 내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복귀하는 것 자체가 챌린지였다. 어쩌다 운이 좋아 시간이 남거나 구내 식당에서 빠르게 점심을 해결하는 날이면 그래도 회사 주변을 한 바퀴 걸을 수 있었다. 사실 그마저도 피곤해서 자리로 돌아와 잠깐 엎드려 있는 게 나을 때가 많았다. 산책하고 싶은 욕망 따위는 먹고 눕고 싶은 욕망에 밀려 내 욕망의 서랍 구석탱이에 처박혀 있었다.


백수가 되고 나서야 내가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매일 어디라도 걷지 않으면 하루를 잘못 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처음에는 산책할 장소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여기저기 걷다 보니 즐겨 찾는 장소도 몇 군데 생겼다. 운정역에서 야당역까지 이어지는 운정호수공원,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일산호수공원, 그리고 내 영혼의 안식처 마장호수. 지금까지는 이 세 군데를 맴돌고 있다.

마장호수 산책로

백수가 되어 좋은 점 중 하나는 원할 때 산책할 수 있다는 것. 겨울에는 볕이 따뜻할 때, 요즘 같은 초여름엔 이른 새벽이나 해질 무렵, 갑자기 무료한 낮, 이렇게 그냥 마음이 동하는 시간에 산책에 나선다. 각 장소를 다양한 시간대에 가다 보니 어디를 어떤 시각에 가야 좋은지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물론 그날 그날 바뀌는 내 필요와 기준에서. 오늘처럼 덥고 자외선이 강한 날엔 산책을 즐기지는 않지만, 굳이 한다면 일산호수공원에 갈 것이다. 그늘이 많기 때문이다. 오늘 새벽처럼 안개가 자욱한 날엔 마장호수를 찾았을 것이고, 가벼운 저녁 산책으로는 운정호수공원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게 공식은 아니다. 산책 장소를 도출하는 함수에는 시간대, 날씨 말고도 그날의 감정이나 정서 상태, 듣고 있는 음악, 그날의 스케줄 등등 포함시켜야 할 요소가 많다. 아직 알고리즘을 만들기엔 내 데이터가 너무 빈약하다.


산책할 때 기본 복장은 편한 옷(주로 운동복), 모자, 선글라스, 호카 운동화다. 산책을 시작할 무렵에는 모자, 선글라스가 필수는 아니었지만, 자주 자외선에 노출되면서 머리카락과 눈도 보호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요즘처럼 덥고 자외선이 강할 땐 냉감 소재의 팔 토시와 자외선 차단용 마스크를 쓰기도 한다. 사실 마스크는 자외선보다 입과 코로 몰려드는 날파리를 방어하는 목적도 있다. 예전엔 이렇게 완전무장을 하고 산책하는 어르신들을 보면 속으로 혀를 차곤 했다. 그런데 내가 산책러가 되고 보니 어르신들의 과하다 싶었던 그 복장이 모두 이해됐다. 멀리서 보면 우주 할머니들처럼 보이는 썬캡과 목 뒷덜미까지 내려오는 천을 덧댄 모자까지도 '그래, 저게 다 이유가 있는 거지.' 하는 경지가 되었다.


여기에 산책 필수품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이어폰. 평소에도 음악 듣는 걸 좋아하지만, 산책할 때 듣는 음악은 그날의 정서를 더 진하게 만든다. 이른 아침 고요한 호수를 걸으며 새소리를 듣는 게 가장 좋지만, 이건 운이 좋아야 가능하다. 대개는 사람들의 발소리, 말소리, 어르신들의 휴대폰이나 휴대용 라디오 스피커로 켜놓은 트로트 음악, 뉴스 소리가 뒤엉킨다. 귀가 예민해서 쉽게 피로해지는 내겐 이런 소음이 스트레스다. 그래서 대부분은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걷는다. 산책이 잦아지고 조깅이 더해지면서 이어폰에 땀이 흘러들어가 찌릿찌릿 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호숫가를 산책하던 최모 씨가 이어폰에 감전돼 사망했다는 뉴스의 주인공이 되기 전에 방수 기능이 있는 이어폰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사고 나서 보니 골전도 이어폰, 오픈형 이어폰 등 저렴한 운동용 이어폰이 많았다. 하지만 애초에 음질을 포기할 의사가 없었으니까 내 선택에 만족하기로.


내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에는 K-pop, 오래된 가요, 클래식, 크로스오버, pop 등등이 정리되어 있다. 평소에는 온갖 장르가 뒤섞인 '좋아요'를 주로 듣지만, 어떤 날에는 특정 플레이리스트나 특정 곡을 지정해서 듣기도 한다. 해 뜰 무렵 안개가 살짝 낀 호수를 걸을 때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곡이나 다니엘 로자코비치가 연주한 멘델스존,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면 왠지 그 풍경과 나만 존재하는 시공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왠지 기운이 없고 텐션을 올리고 싶은 날엔 K-pop, 특히 청하를 듣는다. 컨디션도 기분도 괜찮은 날엔 아이유가 좋고, 가슴이 먹먹한 날엔 가사가 한 글자 한 글자 박히는 가요를 찾아 듣는다. 요즘 매일 듣는 곡은 손디아의 노래들이다. 바람소리가 섞여 있는 목소리로 덤덤하게 부르는 노래인데 오히려 더 애절한 느낌이 든다.


장르가 뒤죽박죽인 '좋아요' 플레이리스트


산책 얘기를 길게 하다 보니, 산책하고 싶다. 이번 주는 폭염이 예정되어 있다니 새벽이나 일몰 후에 가야겠다. 백수 인권선언 같은 게 있다면 제1조에 "백수에겐 언제라도 산책할 권리가 있다."라고 쓰여 있을 것만 같다. 이번 주에는 특별한 산책도 예정돼 있다. 얼마 전 퇴사한 후배와 공원 산책을 함께 하기로 했다. 생각만 해도 설렌다. 뭘 먹으면 좋을지, 산책 전에 먹을지 후에 먹을지, 어느 스팟에서 쉬면 좋을지 이런저런 그림들을 그리며 목요일을 기다리고 있다. 좋구나, 백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