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은 언제나 좋지만 내가 선호하는 시간은 따로 있다. 바로 일출과 일몰 때다. 일출과 일몰 시각은 날마다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마치 뱃사람이 날씨 확인하듯 이를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요즘 같은 여름에는 오전 5시가 조금 넘으면 해가 떴다가 오후 8시쯤 진다. 반대로 겨울이 되면 오전 7시 30분이 넘어서야 해가 뜨고 오후 5시가 조금 넘으면 해가 진다. 계절에 따라 일출이나 일몰 시각이 최대 2~3시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이다.
2024.03.30. AM 6:44 강릉 송정해변의 일출
회사에 다닐 때에는 해가 어떻든 9 to 6 또는 8:30 to 5:30 근무를 위해 하루의 스케줄을 짰다. 가장 오래 다닌 회사는 8시 30분 출근이었고, 집에서 회사까지 1시간은 족히 걸렸기 때문에 늦어도 오전 6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했다. 알람을 끄고도 침대를 벗어나기 아쉬워 몇 분을 뭉그적거리다 일어나곤 했다. 씻고 출근 준비를 마친 뒤 7시 10분에는 집을 나섰다. 주차장에서 회사까지 걸어가는 시간과 예측할 수 없는 도로 사정을 고려해 여유있게 집을 나섰다. 출퇴근길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겨울에는 캄캄했고 여름에는 훤했다. 계절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 기계적인 출퇴근 시간이 가끔은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H.D.소로의 말을 빌리면 '공장의 종소리에 따라 일어나는 하루'였다.
우리가 우리의 비범한 정신에 의해 잠을 깨지 못하고 하인이 기계적으로 흔드는 대로 일어난다면, 또한 천상의 음악에 수반되는 새로운 힘과 내적인 열망에 의해서, 대기를 가득 채운 향기에 의해서 잠을 깨는 것이 아니라 공장의 종소리에 따라 일어난다면 그것을 하루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날에는 거의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전날 잠들 때보다 더 높은 삶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H.D.소로, <월든> 중에서
백수가 된 뒤로는 일출과 일몰 시각이 내 생활에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전날 잠들 때보다 더 높은 삶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알람 없이 해 뜰 무렵 잠에서 깬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산책할 곳을 정한다. 자주 찾는 일산호수공원이나 마장호수에 가려면 차를 이용해야 한다. 드라이브도 좋아하기 때문에 드라이브와 산책을 동시에 즐기는 셈이다. 동틀 무렵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팀 버튼 감독의 영화 속 장면 같다. 어둠이 조금씩 옅어지며 풍경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낸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빛은 점점 태양빛에 포획된다.
2023.10.15. 마장호수의 일출
태양은 어둠을 조금씩 내몰아 세상을 붉은 빛이 살짝 도는 노란 빛으로 물들인다. 일출 무렵 태양이 조색한 풍경은 제 색깔을 훤하게 드러낸 것보다 아름답다. 초 단위로 변하는 세상의 빛깔은 신비하고 숭고한 마음까지 든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걸으면 내가 이 풍경을 구성하는 아주 작은 요소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다. 오랜 세월 어김없이 뜨고 지는 저 태양, 그 기운을 받아 태어나고 자라 결국 소멸하는 이 행성의 자연이 새삼 경이롭게 느껴진다.
해 뜰 무렵 산책하기 좋은 장소는 물가다. 강, 호수, 바다처럼 물을 끼고 있는 곳이라면 일출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물 위로 떠오르는 태양과 태양빛이 수면을 만나 만들어 내는 윤슬이 초 단위로 색채를 바꿔 가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습도가 높고 일교차가 큰 날에는 물안개까지 자욱해 산수화 속에 들어 와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촉촉한 산책로를 걸으며 수증기가 감싸 흐릿해진 사물들의 모양과 색채를 가늠해 본다. 운전하는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때로는 흐릿한 그 풍경이 더 마음에 들어 안개가 천천히 걷히기를 바라기도 한다.
2023.10.15. 이른 아침 마장호수의 물안개
이런 때면 랜덤으로 재생하던 음악을 멈추고 몇몇 곡을 찾아 수동으로 재생한다. 고요하고 평온하지만 가급적 무겁지 않은 곡으로. 예를 들면 이런 곡들이다.
Bach: Concerto in D Minor, BWV 974 - 2. Adagio
Schumann: Gesänge der Frühe, op.133
Brahms: Intermezzo in A major, Op.118 No.2
Elgar: Slaut D′amour Op.12
해 뜰 무렵에 대해 쓰다 보니 가사 때문에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정승환의 'Day & Night'이다. 정말 좋아하는 곡인데, "해가 뜨기 바로 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거라고" 하는 가사 때문에 산책하다 말고 한참 정신을 팔았던 적이 있다. 해가 뜨기 바로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새벽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런 가사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환한데! 검색엔진의 도움을 받아 보니 해 뜨기 직전에는 빛의 굴절 때문에 어느 정도 환하다고 한다. 오히려 한밤 중이 더 어둡다. 고난의 상황에서 반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 관용구처럼 쓰는 문장이지만, "가장 어둡다"를 "가장 춥다"로 바꾸는 게 어떨까 하는 INTP스러운 생각도 해 본다.
일요일 밤, 산책을 업으로 하는 백수는 설레는 마음으로 월요일 아침을 기다린다. 초여름, 상쾌하고 평온한 새벽 산책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