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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과학쌤 Jan 02. 2024

지구 반대편에서 보내는 한여름의 연말과 새해

 드디어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지웠어. 남반구에서 신년 맞이하기. 남반구에서는 반바지를 입고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다가 바다에 뛰어든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거든.


 뉴질랜드에서는 10월부터 크리스마스 준비가 한창이라 연말 행사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어. 11월 말부터는 도시마다 산타 퍼레이드를 하고, 마트에서 파는 소고기에조차 "메리 크리스마스" 딱지를 붙이더라고. 나도 덩달아 '수영복을 입은 산타'가 그려진 하와이안 셔츠를 구입했지.


 우리는 오클랜드에서 대대적으로 광고하던 산타 퍼레이드를 구경했어. 서울로 치자면 광화문 대로를 전부 통제하고 행진을 한 셈이야.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롯데월드에서 매일 보여주는 퍼레이드보다 허접하길래 조금 실망했지만, 시민들이 직접 준비한 것이라기에 뉴질랜드답다 싶었어.


 한편으론 그동안 준비한 것을 11월에 다 풀어버리면 크리스마스엔 뭘 하는 걸까 궁금해졌어. 정답은 "모두 쉰다"! 12월 25일뿐만 아니라 26일까지도 선물 상자를 풀어보는 '박싱데이' 공휴일로 정해 놓고 식당이나 대형 마트가 죄다 문을 닫더라고. 우리도 소고기나 컵케잌 같은 것들을 미리 쟁여두고 숙소에서 칩거하며 소소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냈어.



 그러다 보니 신년 맞이에 대한 기대치가 조금 낮아졌지만, 그래도 최대한 북적북적하게 보내고 싶어서 12월 마지막 날에는 남섬에서 가장 큰 도시로 갔어. 북반구의 연말과 크게 다른 점은 여름이라 낮이 길다는 거야. 일몰 시간이 밤 9시라, 10시까지도 하늘에 어스름하게 빛이 남아 있거든. 밤 10시쯤 가벼운 차림으로 어슬렁거리며 헤글리 공원으로 걸어갔어.


 공원 한편에는 락 페스티벌처럼 무대와 가드라인, 푸드 트럭이 설치되어 있었고, 라이브 공연이 한창이었어. 제법 갖춰진 축제 분위기에 놀랐고, 늦게 도착했는데도 사람이 많지 않아서 앞쪽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어. 무대를 보여주는 커다란 스크린이 놀라울 만큼 고화질이라는 것도 인상 깊었지.


 문제는 자정이 다가올수록 빗줄기가 굵어졌다는 거야. 이제는 뉴질랜드에 적응해서 웬만한 비는 우산 없이 맞고 다니는 수준이 되었는데, 11시 반부터 심하다 싶은 폭우가 쏟아졌어.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바깥으로 우르르 나가서 나무 밑에 옹기종기 모여 신년을 기다리게 되었지.


 그러다가 1월 1일을 10분쯤 남겨두고 무대로 돌아가려는데, 경찰들이 펜스를 치기 시작했어. 이제부터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서 말이야. 여러 겹의 펜스 사이에 갇힌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지. 우리를 포함해서. 몇몇 사람들은 안에 있는 가족을 만나야 한다면서 부탁하기도 했어. 짧은 혼돈의 시간이 지나고, 가장 바깥 라인의 펜스를 기준으로 그보다 안쪽의 사람들은 모두 들여보내주기로 결정되었어.


 받았다가 뺏길 때가 가장 서운하고, 못 받는 줄 알았는데 얻게 될 때가 가장 기쁘잖아. 코앞에서 놓치는 줄 알았던 카운트 다운을 즐기게 되니 발걸음이 방방 날아올랐어. 스크린에 커다랗게 시계가 나오고, 무대에서는 밴드 그룹이 간주를 조절하면서 시간을 맞추고 있더라고. 마침내 10초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어.



 라이브 공연과 함께 다 같이 숫자를 외쳤고, 0시에 맞춰 하늘에 팡팡 불꽃이 터졌어. 음악이랑 불꽃과 함께 쏟아지는 비를 맞으니 워터밤이 따로 없었지. 상상했던 것처럼 수영복을 입고 바다에 뛰어들진 못했지만, 여름 밤에 홀딱 젖었으니 대충 상상과 비슷한 신년맞이지 뭐.


 뉴질랜드는 날짜 변경선 옆에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빨리 새해를 맞이하는 나라래. 남반구에서 남들보다 조금 일찍, 조금 다르게 맞이한 새해. 나의 2024년은 일 년 하고도 네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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