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원용 Jul 19. 2016

9가지 놀라운 깨달음이 내 세상을 뒤집다

글쓴이의 허락을 얻어서 "9 Mind-Bending Epiphanies That Turned My World Upside-Down"를 아래처럼 번역했습니다. 원문의 출처를 밝히신다면 마음대로 다른 곳에 옮기셔도 좋습니다. 글쓴이에게 그렇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리 스몰린의 책 "Time Reborn"은 2번과 관련이 있고, 책 "불멸의 이론"(휴먼사이언스, 2013)은 8, 9번과 관련이 있습니다 (최소한 저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1번과 관련된 책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양문, 2008)

"네 가지 약속 - 천년간 전해온 톨텍 인디언의 위대한 가르침" 돈 미겔 루이스 (김영사, 2012)

"존 카밧진의 마음챙김 명상 - 당신이 어디에 가든 당신은 그곳에 있다" 존 카밧진(물푸레, 2013)


http://www.raptitude.com/2010/10/9-mind-bending-epiphanies-that-turned-my-world-upside-down/

"9가지 놀라운 깨달음이 내 세상을 뒤집다"

(9 Mind-Bending Epiphanies That Turned My World Upside-Down)


데이비드 케인 (David Cain)


여러 해 동안 나는 작은 꾀와 깨달음을 여럿 얻었고 그 덕에 삶이 나아졌다. 하나씩 배운 것들이 쌓여서 하루하루의 삶이 편해지고 좋아졌다. 그러나 큰 변화는, 내 생각을 뒤흔들고 현실을 완전히 다르게 보게 만든 몇 안 되는 깨달음에서 왔다.


삶의 질이 무엇에 좌우되는지 생각해 보면, 10년 전에 살던 세상과,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은 완전히 다른 것 같다. 세상(과 사람들)이 실제로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내 생각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이 깨달음 중에는 당신이 이미 아는 것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당신이 막 알아채려는 것일 수도.


1.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 아니다. (You are not your mind.)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 "지금 이순간을 살아라" 책의 첫 장에서 —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뭐겠어? 내 머리 속에서 재잘거리는 생각들이, 내 삶을 이루는 경험들이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나"라는 것은 당연했다.


이제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삶이란 흘러가는 경험들일 뿐이고, 생각은 내가 경험하는 것 중 한 가지일 뿐이다. 냄새맡는 것, 보는 것, 듣는 것만큼 생각이 중요하다. 생각이 더 중요하지 않다. 다른 경험처럼 생각도 의식에 떠오르고, 어떤 느낌을 동반하고, 그리고 다른 것에 자리를 내 주고 멀어진다.


다른 사물을 관찰하는 것처럼 당신의 생각을 관찰할 수 있다면, 그 관찰을 하는 것은 누구인가? 바로 대답하지 말라. 이 질문과, 말할 수 없는 대답이, 모든 위대한 종교와 영적인 전통의 중심에 있다.


2. 삶은 순간순간으로 이루어진다. (Life unfolds only in moments.)


물론이다! 한동안 내가 깨달은 것 중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 순간의 일부분이 아닌 것을 경험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삶의 유일한 문제는,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이것을 깨닫기 전까지 나는 내 삶 전체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닌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이 한 순간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이 삶과 접촉하는 유일한 순간이고, 조금이라도 쓸모있는 결과를 얻으려면 이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과거나 미래를 상대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과거와 미래는, 이 순간에 생각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바꾸려는 헛된 시도를 할 수 있다.


3. 삶의 질은 매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는지에 달려있다. 실제로 어떤 순간이 일어나고, 어떤 순간이 일어나지 않는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Quality of life is determined by how you deal with your moments, not which moments happen and which don’t.)


이제 나는 이것을 행복의 첫 걸음으로 여긴다. 하지만 놀랍게도, 모든 상황을 장악해서 정확히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 싶다는 유혹이 아직도 있다. 원치 않는 상황에 마주쳐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현명하고 행복하다. 타이어가 펑크나거나, 공교로운 때에 아프거나, 어떤 것을 넘어뜨려서 깨뜨려도, 그래도 그것으로 고통받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라. 나쁜 일이 생길 때, 그것을 기꺼이 마주하기로 스스로 약속하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것이 더 나은 삶의 방식이다. 효과가 없는 쉬운 방식은, 힘을 충분히 얻어서 상황을 장악하고 원하는 것을 더 자주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겸손한 생쥐(Modest Mouse)"의 노래 중에 이 지혜를 말하는 가사가 있다: "삶이 길어지면, 끔찍했던 것도 덜 그렇다 (As life gets longer, awful feels softer)".


4. 삶의 대부분은 상상한 것이다. (Most of life is imaginary.)


인간은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너무나 당연해서, 거의 항상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상대하는 것의 대부분은 세상 자체가 아니라, 세상과 관련한 우리의 생각, 우리의 기대, 우리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이다. 어떤 것을, 그것에 관한 생각과 혼동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결국, 삶에서 경험하는 것의 대부분은 상상한 것이다. 마크 트웨인이 말했다. "나는 삶에서 끔찍한 것들을 겪었는데, 그 중에는 실제로 일어난 것도 있다." 가장 좋은 처방은? 마음챙김(mindfulness)이다.


5. 인간은 고통받도록 진화했다, 그리고 고통받기는 인간이 가장 잘하는 것이다. (Human beings have evolved to suffer, and we are better at suffering than anything else.)


어이쿠. 이것은 속박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처럼 들리지 않는다. 전에는 고통스러우면 나한테 뭔가가 잘못되었다—내가 삶을 "잘못"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고통은 온전히 인간적이고, 온전히 정상이고, 그리고 고통이 있어야 하는 훌륭한 이유가 있다. 강한 공포와 흥분의 순간들은 드물고 그 사이에 "이것이 아주 좋지는 않아, 더 좋은 수가 있을거야"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한 덕에 인간은 수백만 년 동안 살아 남았다. 우리의 거의 모든 행동은, 지금 이 순간을 바꾸거나, 이 순간에서 벗어나려는 충동에서 나온다. 이 간단하고 무자비한 생존 메카니즘은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이 되지만, 끔찍한 부작용을 낳는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큰 고통을 받는다. 삶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부터 덩굴손처럼 자라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주 암울하게 들릴지라도, 이 통찰은 우리를 해방시킨다. 왜냐하면, 1) 고통이 내 삶이 잘못가고 있다는 뜻은 아니고, 2) 내가 하기 나름이므로, 내가 얼마나 고통받을지는 궁극적으로 내게 달려 있고, 3) 모든 문제에는 같은 원인과 같은 해결책이 있기 때문이다.


6. 감정은, 우리를 한쪽으로 몰기 위해 존재한다. (Emotions exist to make us biased.)


이 깨달음은, 과거에 내가 감정을 이해했던 것과 완전히 반대이다. 전에는 내 감정을 보고, 내가 옳은 길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 내 삶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랬다 저랬다 흘러가는 감정 상태가, 스스로의 가치나, 삶의 자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감정은 당신이 어떤 것에 집착하는지를 알려준다. 문제는 감정 때문에 우리가 더 편향되면서 동시에 더 단호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생존 메카니즘이지만, 인간에게 끔찍한 부작용을 낳는다.


7. 사람들이 행동하는 동기는 모두 똑같다, 욕망을 충족시키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All people operate from the same two motivations: to fulfill their desires and to escape their suffering.)


이것을 깨닫고 나서야 마침내 사람들이 왜 서로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는지를 알 수 있었다. 깨닫기 전에는,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있다고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그건 게으름이지 설명이 아니었다. 이제는 안다.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보이더라도, 그 사람은 (그 순간에) 욕망을 충족시키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골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이 동기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다만 그 방법에서 다를 뿐이고,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은 우리가 자란 환경, 우리의 삶의 경험, 그리고 우리의 마음챙김에 달려있는 것이다. 능숙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 방법도 있지만, 서투르고 파괴적인 방법도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파괴적인 행동은 무의식적이다. 따라서 선과 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있다. 이 깨달음은 도덕과 정의에 관한 나의 오랜 생각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8. 믿음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Beliefs are nothing to be proud of.)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성취가 아니다. 나는 믿음이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랐다. 그러나 믿음이란,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한 의견일뿐이다. 믿음은 쉽다. "믿음의 강도"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거부하는 강도이다. 따라서,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성장이나 현명함에 문을 덜 열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을 자랑스럽게 여기자마자, 믿음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에 무엇인가가 더해진다고 생각하자마자 그 믿음은 자존심의 일부가 된다. "완고한" 보수주의자, "완고한" 진보주의자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을 당신이 똑같이 믿지 않으면 당신이 하는 말을 전혀 듣지 않을 것이다.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만족스럽다. 찬성하는 것도 만족스럽다. "완고한" 사람들은 이 만족감에 도취하려고 한다. 믿음이 있는 곳마다 닫힌 문이 있다. 가장 정직하게, 가장 낮은 자리에서 철저하게 검토한 후의 믿음만을 유지하라, 그리고 그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


9. 객관성은 주관적이다. (Objectivity is subjective.)


삶은 주관적인 경험이고 거기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나의 모든 경험은,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관점을 통한 것이다. 내가 직접 겪는 것에 대해서, 누가 평가를 할 수도 없고, 그게 진짜라고 증명할 수도 없다. 여기에, 어떻게 살 것인지에 관해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 첫째, 나만의 개인적인 경험을 믿어야 한다. 나 말고는 아무도 이 관점에서 경험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이 관점에서 경험한다. 둘째, 세상에 대한 나의 "객관적"인 지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내 주변의 세상이 더 경이롭게 느껴졌다. 내가 구성한 것은, 내가 읽은 책, 내가 만난 사람, 내가 한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 나는 다른 누구와도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내가 사는 세상은 다른 누가 사는 세상과도 같지 않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지, 삶이 내게 무엇인지를, 내가 아닌 외부의 관찰자가 판단하도록 해서는 결코 안된다. 주관성이 일차적인 경험이다. 이것이 진짜 삶이고, 객관성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 각자가 개인적인 경험 위에 구성한 것이다. 이 진실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종교와 과학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