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과 함께 산천을 호령했던 동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야생에서는 그 동물의 위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로 ‘호랑이’입니다. 현재 호랑이는 시베리아 호랑이, 벵골 호랑이, 말레이 호랑이, 인도차이나 호랑이, 수마트라 호랑이, 남중국 호랑이, 발리 호랑이, 자바 호랑이, 카스피 호랑이 9개의 아종(亞種)으로 분류되는데, 이중 발리 호랑이와 자바 호랑이, 카스피 호랑이는 멸종되었습니다. 한국 호랑이는 시베리아 호랑이(Panthera tigris altaica)로 분류되는데, 백두산 호랑이, 아무르 호랑이, 동북 호랑이 등으로 불립니다.
아종(亞種) :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그 분포와 생태가 다른 분류군. 아종끼리는 공통된 형질이 많아 번식이 가능하지만 오랫동안 격리되면 별개의 종으로 분화될 수 있음
지난해 2월 에버랜드에서는 당시 5살 동갑내기 시베리아 호랑이 수컷 태호와 암컷 건곤이 사이에 오빠 태범이와 여동생 무궁이가 태어났습니다. 현재 엄마와 남매 호랑이는 타이거밸리에 살고 있지만, 아빠 호랑이는 격리돼 있습니다. 야생에서 암수 호랑이는 교미 시기에 만난 뒤 헤어져 단독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새끼 호랑이도 수컷은 2~3살, 암컷은 3~4살 정도가 되면 엄마 곁을 떠나 성체로서의 독립된 삶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에버랜드는 새끼 호랑이 태범이와 무궁이가 독립된 성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하면서, 다시 아빠 태호와 엄마 건곤이를 합사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순종 시베리아 호랑이입니다. 9개 아종의 호랑이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크고 용맹합니다. 수컷은 몸길이 220~380cm, 몸무게 150~350kg, 암컷은 몸길이 180~280cm, 몸무게 100~200kg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베리아 호랑이는 추운 지역에 사는 만큼 벵골 호랑이보다 추위에 강하고 굵고 긴 털을 지녔습니다.
호랑이의 교미기간은 11월에서 4월 사이의 겨울인데, 수컷은 이때가 되면 짝을 찾아 먼 길을 떠돌아다닙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포효합니다. 호랑이의 울음소리는 낮은 음이지만 매우 먼 곳까지 들려 가까운 곳의 다른 수컷을 위협하고 암컷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데 유리합니다. 임신기간은 약 100일로 한배에 1~4마리의 새끼를 낳습니다.
호랑이의 최대 무기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입니다. 멧돼지나 사슴을 주로 사냥하며, 자신의 온몸을 던져 덮치거나 커다란 앞발로 먹이를 공격합니다. 이어 목 부위를 물어 기도를 절단하거나 중추골을 단번에 부숴 제압합니다. 잡은 먹이 가운데 큰 것은 서늘한 곳에 옮겨 놓고 여러 날에 걸쳐 먹기도 합니다. 한 번에 배불리 먹으면 일주일 가까이 먹지 않고 굶는 날도 많습니다.
호랑이는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의 ‘적색목록’에 지정된 멸종 위기종입니다. 지난 세기에 전체 야생 호랑이의 97%가 사라졌다는 충격적인 사실로 인해 호랑이를 멸종 위기에서 구하자는 취지로 2010년 러시아에서 개최된 ‘호랑이 정상회담(Tiger Summit)’에서 해마다 7월 29일을 ‘국제 호랑이의 날(International Tiger Day)’로 제정했습니다.
1900년대 초에는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 일대에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습니다. 하지만 농업의 발달과 밀렵 등의 서식지 파괴로 호랑이의 개체 수가 크게 줄었습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에는 호랑이를 ‘해로운 짐승’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소탕 작전이 이루어졌습니다. 한반도에서 호랑이의 출현은 1921년 10월 경주 대덕산에서 수컷 한 마리가 붙잡힌 것이 마지막 기록입니다.
국가 차원에서 멸종위기종으로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랑이는 여전히 멸종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해 2월 러시아 연해주 고골레프카 마을의 고속도로에서 생후 4~5개월 된 새끼 호랑이가 도로를 건너다 버스에 치여 죽었습니다. 도로가 호랑이의 생존을 위협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 것입니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산림경비대에 의해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된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시베리아 호랑이들에게 원격 추적 장치를 달아 호랑이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인을 추적했습니다. 그 결과 자연사한 4마리를 뺀 20마리가 사람과 관련된 원인으로 죽었습니다. 확실한 밀렵이 10마리, 밀렵 의심이 8마리였고, 자동차와 충돌은 2마리였습니다. 밀렵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밀렵이 가능하게 된 주된 원인은 도시에서 외진 시골로 뚫린 도로였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숲으로 도로를 내면 야생 동물이 살아가는 서식지의 면적이 줄어듭니다. 또한 도로변의 숲 가장자리는 숲 내부와 달리 햇빛, 온도, 습도, 바람 등의 변화가 심해서 숲 내부에 살고 있던 기존 생물종들은 삶의 터전을 잃기 쉽습니다. 즉, 도로로 인해 서식처가 끊기는 단편화와 숲의 가장자리가 증가하여 내부종(interior species)의 서식이 불리해지는 가장자리 효과는 생태계 먹이그물의 최상위를 차지하는 호랑이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현재 두만강 하류 근처에는 약 30~50마리의 시베리아 호랑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 러시아와 중국에서 큰 도로와 철도 같은 산업시설이 들어서면서 야생동물의 서식처가 점차 섬처럼 고립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서식처에 살아가는 호랑이들끼리 만날 수 있는 이동 통로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서식처의 고립화는 단순히 서식 영역과 먹이자원이 줄어드는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호랑이의 개체 수가 줄면 궁극적으로 유전적 다양성이 떨어집니다. 유전적 다양성이 떨어지면 환경 변화나 질병에 약해지고 그 생물종은 급속히 멸종의 길로 치달을 위험이 커집니다.
이 때문에 과학자들은 ‘어떤 동물이 100년 뒤에도 멸종하지 않고 번식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정한 개체 수 이상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최소존속개체군’(Minimum Viable Population, MVP)이란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형 포유류인 반달가슴곰은 50마리, 개체 수 변동이 심한 조류는 1,000마리 이상이 멸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소 집단 크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러시아는 연해주에 시베리아 호랑이와 아무르 표범의 보전과 복원을 목적으로 ‘표범의 땅 국립공원’을 설립해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과 접해 있고 중국의 ‘동북 호랑이·표범 국립공원’과도 접해 있어 생태계의 요충지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여우, 늑대, 사슴, 스라소니 등 한반도에서 절멸되거나 멸종위기에 놓인 야생동물들도 살고 있습니다.
이에 ‘표범의 땅’과 ‘동북 호랑이·표범 국립공원’은 우리나라 토종 호랑이와 표범의 복원을 위한 교두보가 될 수 있습니다. 2020년 환경부 산하 국립생태원은 러시아 ‘표범의 땅 국립공원’과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멸종위기종 보전을 위해 공동 연구와 협력을 펼쳐 나가기로 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호랑이와 표범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범’이라고 부르며 오랜 역사를 함께 해왔습니다. 앞으로 북한과도 협력하여 백두산과 개마고원 일대,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자연 생태계를 잘 유지해 나간다면 언젠가 범이 한반도로 되돌아오는 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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