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사과 하나면 의사가 필요 없다
(An apple a day keeps the doctor away).
서양 속담이 말해주듯 사과는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 유기산이 풍부한 과일입니다. 껍질을 벗기지 않고도 먹을 수 있고, 얼리지 않으면 수개월 동안 보관할 수 있어 예부터 인류에게 중요한 식량으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사과는 과일로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잼과 식초, 주스, 파이, 술 등 다양한 형태로 가공해 다채로운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류가 사과를 좋아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열매가 충분히 크기 때문입니다. 사과 하나는 보통 200~300g 정도입니다. 만약 사과 크기가 체리만큼 작다면 먹기에 번거롭고 과육의 비율도 낮아져 지금보다 더 많은 개수를 섭취해야 같은 양의 칼로리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사과의 조상은 원래 체리만 한 크기였습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열매의 크기가 큰 쪽으로 진화의 선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1929년 옛 소련의 식물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카자흐스탄에서 야생사과가 자생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 지역의 이름은 알마아타(Алма-Ата)로 야산 곳곳에서 야생사과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알마아타는 카자흐어로 ‘사과의 할아버지’란 뜻입니다. 지명 자체가 사과의 고향임을 웅변해준 셈입니다.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수도가 된 알마아타는 ‘사과의 도시’를 뜻하는 알마티(Алматы)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알마티는 토양이 비옥하고 강수량도 충분해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특히 과일나무가 많은데 사과만 해도 수십 종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들 사과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오늘날처럼 크기가 크고 달콤한 재래종과 체리만 한 야생종 사과의 유전자가 매우 비슷했습니다.
나아가 재래종과 야생종 사과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 사과의 크기가 커진 선택의 주체는 바로 곰이었습니다. 곰이 즐겨먹는 것이라면 연어나 꿀이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곰은 나무를 타고 가지에 달린 열매를 따거나 떨어진 과일을 발톱으로 긁어모아 먹습니다. 원래 육식성이었다가 잡식성으로 진화한 곰의 턱은 과일을 씹어 먹기에 비효율적인 구조를 지녔습니다. 그래서 곰은 사과를 먹을 때 대충 씹고 삼켜 넘깁니다. 곰의 뱃속에 들어간 사과는 위와 장을 거치면서 과육은 소화되고 씨앗은 배설물과 함께 땅에 뿌려졌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크기가 작은 사과는 제대로 씹히지 않아 거의 온전한 채 배설됩니다. 사과를 비롯한 대부분의 과일들은 씨앗이 붙어있는 자리인 태좌(씨방에서 밑씨가 붙는 부위)에 씨앗이 발아하는 것을 억제하는 물질이 포함돼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곰의 입에서 으깨질 정도의 큰 사과만이 곰의 소화액에 씨앗이 노출됨으로써 씨앗의 발아를 억제하는 물질이 벗겨졌던 셈입니다.
반면 크기가 작은 사과는 통째로 곰의 입에 들어가 그 상태로 배설될 가능성이 큽니다. 과육으로 둘러싸인 사과의 씨앗이 곰의 소화액에 닿지 않은 채 곰의 몸 밖으로 나왔다면 싹을 틔울 가능성은 크게 줄어듭니다. 또한 곰은 단 것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배가 어느 정도 찬 상태에서는 달콤한 사과만을 골라 먹었을 것입니다. 결국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크기가 크고 달콤한 사과의 유전자만이 선택되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 과일을 산 뒤에 맛있어 보였던 겉보기와 맛이 달라 후회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대부분의 소비자는 사과를 고를 때 껍질에 윤택이 흐르고 색이 선명한 것을 선호할 겁니다. 과연 보기에 좋은 사과가 먹기에도 좋을까요?
농부들은 과일의 색을 좋게 내기 위해 재배할 때 일정 기간 동안 과일에 봉지를 씌워 햇빛을 막습니다. 과일 껍질에서 엽록소가 파괴되는 걸 막기 위해서입니다. 과일이 익어가는 과정은 나뭇잎에 단풍이 드는 과정과 같습니다. 단풍은 날씨가 추워지면 녹색을 띠는 나뭇잎의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그 아래 숨어있던 붉은색과 노란색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색은 안토시아닌이나 카르티노이드 같은 색소가 만듭니다.
과일이 성숙기가 되면 기체 형태의 식물호르몬인 에틸렌(C₂H₄)을 발생시켜 엽록소를 파괴하고 안토시아닌이나 카르티노이트 같은 색소를 활성화시킵니다. 바로 이때 과일에 봉지를 씌워 햇빛을 가리면 사과나 포도의 색이 더 선명해집니다. 햇빛을 가리면 광합성 작용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엽록소가 줄어드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햇빛을 차단하는 일은 농부에게 장점이면서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봉지를 씌우면 과일의 색상은 예뻐질 수 있지만 과일의 성숙이 지연돼 당도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유기산과 비타민 함량도 낮아져 봉지를 씌우지 않은 사과에 비해 맛이 떨어집니다. 겉만 보고 사과를 골랐을 때 실패하는 이유입니다.
한국식품연구원에서는 일반인 500명과 전문가 30여 명을 대상으로 3년 동안 수천 개의 사과를 먹게 해 사과의 맛과 껍질색을 평가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사과의 맛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색이나 크기 같은 외모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맛있는 사과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사과는 당도가 12°Bx(1브릭스는 과일 100g에 들어있는 당분 1g을 말함) 이상이 되어야 ‘특등급’의 당도로 평가됩니다. 보통 배는 11~12°Bx, 귤은 13°Bx, 포도는 18°Bx 정도여야 사람들이 달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달기만 해야 맛있는 과일일까요? 아닙니다. 가령 설탕을 한 스푼 가득 떠먹었을 때 맛있다고 느껴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과일도 단맛과 신맛이 적당히 조화를 이룰 때 좋은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조화로운 맛을 내는 황금비율을 당산비(당함량÷산함량)라고 합니다. 사과의 경우 가장 달다고 느끼는 품종은 당산비가 평균 41이상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사과인 후지(부사) 품종은 당산비가 36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당과 산의 함량은 과일이 익어가는 과정에서 계속 변합니다. 과일이 처음 만들어질 때는 산이 많아 신맛이 강하지만 익어갈수록 산이 줄어들어 먹기 좋은 양만 남습니다. 반면 당분은 초기에는 거의 없다가 수확기에 가까워질수록 급격히 늘어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때 단맛을 내는 당분의 함량은 씨앗이 있는 중심부터 늘어나서 점차 껍질이 있는 가장자리로 확대됩니다. 아직 덜 익은 풋사과를 먹었을 때 껍질 부근보다 씨앗 부근에서 더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단 것을 좋아하는 해충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과일이 성숙할 때까지 떫은 맛이 나도록 설계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신맛이 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씨앗 부근은 달콤함을 안겨줄지도 모르니까요.
참고문헌
Harris, S. A., J. P. Robinson and B. E. Juniper. 2002. Genetic clues to the origin of the apple. Trends in Genetics 18:426-430.
Juniper, B. E., and D. J. Mabberly. 2006. The Story of the Apple. Portland, Ore.: Timber Press.
Michael Pollan, 1998, Breaking Ground: The Call of the Wild Apple, The New York Times, November 5
Shih-Hsin Tu, Li-Ching Chen, Yuan-Soon Ho, 2016, An apple a day to prevent cancer formation : Reducing cancer risk with flavonoids, Journal of Food and Drug Analysis, 25(1), pp.119-124.
이준덕, 2008, 과일 맛 결정하는 ‘황금비’, 과학동아 10월호, pp.108-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