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겐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피부에 양보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요? 피부의 주요 성분이 콜라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화장품이나 식품 광고를 많이 접해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콜라겐은 탄력 있는 피부를 만드는 데 필요하긴 하지만, 피부에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놀랍게도 우리 조상들은 이 콜라겐으로 멋진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요. 과연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기원전 2만 년경 라스코 동굴과 알타미라 동굴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은 문득 벽과 다른 색을 지닌 돌이나 흙으로 벽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구석기인들은 물질 속에 있는 색소가 색을 낸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훌륭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들의 작품을 오늘날에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색소가 그대로 동굴 벽면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색소는 빛을 흡수한 후 특정 파장만 방출해 색을 내는 물질입니다. 투명하지 않은 물질은 모두 색소를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 물질이나 모두 색소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일부 광물이나 동식물만 색소의 양이 충분하고 색이 선명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색소는 염료와 안료로 구분합니다. 용매에 용해되면 염료, 용해되지 않으면 안료라고 부릅니다. 염료는 입자의 크기가 작고 물이나 기름에 녹기 때문에 옷감을 염색하는 데 적합합니다. 안료는 용매와 완전히 혼합되지 않고 분산된 상태로 용매와 섞여 있는 콜로이드 형태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안료를 물에 타서 그림을 그리면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안료는 용매에 분산된 상태로 있기 때문에 물이 증발하면 벽이나 종이에서 쉽게 떨어지는 박리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동서양의 화가들은 이러한 안료를 고착시키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의 화가들은 그림 그리는 일과 함께 화학 실험을 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가들이 찾은 첫 번째 해결 방법은 젖은 석회를 이용한 방법이었습니다. 석회(Ca(OH)2)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CO2)를 흡수해 탄산칼슘(CaCO3)이 되면서 굳는 성질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건물 벽을 만들 때 그림도 같이 그리는 것입니다. ‘신선하다’는 뜻의 프레스코(fresco) 기법은 벽에 석회를 바른 후 물기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 석회가 굳을 때 안료도 함께 고착시키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젖은 석회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야 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섬세한 표현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이러한 프레스코 기법을 이용하여 번지는 듯 부드러우면서 매우 기품 있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합성 안료가 등장하기 전까지 오랜 세월 동안 안료의 종류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단지 변한 것은 안료를 고착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석회 벽면이 아닌 다른 곳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물감이 마르고 난 후에도 안료가 붙어 있도록 고착시킬 물질이 필요했습니다. 전색제(vehicle)는 물감에서 안료를 제외한 성분으로 안료를 종이나 캔버스에 고착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화가들이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전색제는 계란 노른자였습니다. 템페라(tempera)는 ‘‘안료와 매체의 혼합’이라는 어원을 가진 물감의 일종으로 안료에 물과 계란 노른자를 섞어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계란 노른자는 물감이 마른 후에도 안료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고착제 역할을 했습니다. 계란 노른자 외에도 아교나 벌꿀, 수지 등을 전색제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5세기 초 네덜란드의 화가 얀 반 에이크는 아마인유와 안료를 혼합한 유화 물감으로 혁신적인 그림을 그립니다. 반 에이크는 <아르놀피니의 결혼(1434)>이라는 작품을 통해 유화 물감이 사실주의 표현에 적합한 재료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유화는 서양화의 대명사가 될 만큼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수채화 물감은 식물성 수지인 아라비아 수지(arabia gum)를 전색제로 사용합니다. 물은 수채화 물감의 농도 조절과 함께 아라비아 수지를 녹입니다. 기름과 달리 아라비아 수지는 당단백질과 다당류로 되어 있어서 물에 잘 녹습니다. 수채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후 물이 증발하면 아라비아 수지가 안료를 고착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유화를 일컫는 유채화(oil painting)는 ‘기름으로 그린 그림’, 수채화(watercolor painting)는 ‘물로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색은 안료가 표현하지만, 안료를 고착시키는 전색제의 종류에 따라 그림의 느낌이 달라지는 것이 매우 흥미롭지요.
전색제는 동양화에서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동양화는 전색제를 기준으로 그림을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먹으로 그리는 수묵화와 안료를 사용하는 채색화로 나누는데, 둘 다 아교를 사용합니다. 서양화처럼 전색제를 기준으로 구분한다면 아교를 사용한 동양화는 모두 교화(아교화)라고 불러야 하겠지요.
아교는 콜라겐(collagen)이 주성분입니다. 콜라겐은 동물의 힘줄이나 가죽, 연골 등 결합조직의 주성분입니다. 동물의 가죽이나 힘줄을 끓여서 콜라겐 단백질을 추출해 굳힌 것을 젤라틴이라고 하는데 젤라틴 중에서도 불순물이 섞여 있는, 소위 ‘덜 정제된 젤라틴’이 아교입니다. 아교는 물에 녹여서 접착제로 사용하기도 하지요. 그림 그릴 때 아교를 사용하는 이유는 물이 증발하면 단백질 사이에 가교결합이 형성되어 굳으면서 안료를 고착시키기 때문입니다. 아교는 먹(墨)을 만들거나 광물성 안료, 물과 함께 개어 채색화에 필요한 물감을 만들 때도 사용합니다. 먹은 순수한 탄소인 그을음과 아교를 잘 섞어서 반죽하고 사향과 같은 향료를 넣어서 굳혀 만듭니다. 먹에서 나는 특유의 향은 이것 때문에 나는 것이지요.
*가교결합 : 사슬 모양으로 결합해 있는 원자 중 임의의 두 원자 사이에 다리를 걸치듯이 형성된 결합으로 다리결합(bridged bond)이라고도 함.
화선지는 셀룰로스(섬유질)로 되어 있어 친수성일 뿐 아니라 많은 미세한 구멍으로 인해 모세관 현상을 일으킵니다. 물을 잘 흡수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크로마토그래피처럼 부드럽게 번지는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수묵화에서는 심성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번짐 효과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채색화는 번짐이 심하면 그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먼저 아교와 명반을 섞은 물로 코팅을 하는 ‘아교포수’를 한 후 그림을 그립니다. 여기서 아교포수는 화선지의 구멍을 막고 안료의 접착력을 높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콜라겐은 탄력 있는 피부를 만드는 데에도 필요하지만 동양화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요소로서 우리 역사 속 수많은 그림들이 아름다움과 선명함을 잃지 않게 유지시켜 조상들의 미적 감각과 정신세계가 빛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 크로마토그래피 : 혼합물을 분리하는 실험적인 기법 중 하나로, 고정상과 이동상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물질들이 섞여 있는 혼합물을 이동 속도 차이에 따라 분리함.
추천 사이트 : http://fluorf.net/articles.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