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오후, 넷플릭스를 채널을 이리저리 검색하다가 ‘일하는 세포’라는 낯선 제목의 콘텐츠를 발견했습니다. 우리 몸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사회로 보고,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세포들을 이 곳에서 일하는 직장인들로 묘사한 애니메이션 시리즈였습니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의 종류는 약 200여종이며, 그 수는 대략 37조(兆)개에 달합니다. 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수많은 세포들 중 가장 ‘짠한’ 세포가 있는데 바로 흔히 백혈구라 불리는 면역세포들입니다. 이들은 늘 몸 구석구석을 순찰하며 우리 몸을 노리는 다양한 병원균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지만, 그 때문에 늘 피칠갑을 하고 다니는 ‘살인자’라며 (정확히는 ‘살균자’이겠지만요) 다른 세포들의 수근거림을 듣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우리 몸 전체의 건강을 위해서 말이죠.
혈액을 뽑아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리면, 세포로 이루어진 적혈구는 상대적으로 무거워 아래로 가라앉고, 액체로 이루어진 혈장은 위로 떠서 층이 나뉩니다. 이때 검붉은 적혈구 층과 노란 혈장 층 사이에 버피 코트(buffy coat)라 불리는 얇은 층이 하나 더 나타납니다. 이 버피 코트는 눈으로는 하얗게 보이기에 이 층을 구성하는 세포들에 백혈구라는 단순한 이름이 붙었습니다 (사실은 백혈구와 혈소판의 혼합층입니다). 백혈구는 혈액의 약 1% 정도로 많지는 않지만, 매우 다양한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포의 숫자로만 보면 적혈구가 백혈구에 비해 1000배 이상 더 많지만, 수많은 적혈구가 모두 한 종류의 세포인데 반해, 백혈구는 여러 종류의 세포들이 얽힌 혼합체입니다. 그 이유는 이들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면역 기능을 담당하는 세포들이거든요.
면역(免疫)이란, 어떤 생명체의 체내에 들어온 병원체에 대항하여 항체를 생산하여 독소를 중화하거나, 혹은 병원체를 죽여서 다음에는 그 병에 걸리지 않게 만드는 작용, 혹은 그러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들어오는 병원체들은 그 종류가 어마어마하게 많고, 각각 그 특성과 침범 패턴이 다릅니다. 이런 다양한 외부의 적들을 꼼꼼하게 방어하려면 면역세포들도 방어 및 공격 패턴이 다양해야 합니다. 그러니 백혈구 역시 종류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흔히 백혈구라 일컬어지는 면역세포들은 출신 지역에 따라 크게 골수에서 만들어지는 골수구계 전구세포에서 유래하는 종류와 가슴샘에서 만들어지는 림프구성 면역세포로 나뉩니다. 골수구계 면역세포들이 주로 선천면역을 담당한다면, 림프구성 면역세포들은 주로 후천면역을 담당하지요. 그런데 골수에서 만들어지는 면역세포들의 이름이 특이합니다. 이들에게는 각각 호중구, 호산구, 호염기구라는 이름이 붙어 있거든요. 이름만 보면 면역세포라기보다는 중성, 산성, 염기성 지시약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생물의 조직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세포들이 한데 얽혀 있기에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종종 이들을 좀더 쉽게 구별하기 위해서 특정한 물질로 염색하곤 합니다. 이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세포 염색제가 헤마톡실린(haematoxylin)과 에오신(eosin)이라는 염색제입니다. 이 두 가지 염색제를 줄여서 H&E 염색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특성은 산성도에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산도가 높으면 빨강으로, 낮으면 청보라색으로 염색됩니다. 처음에 백혈구를 발견했을 때 이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H&E 염색제로 염색했을 때 나타나는 색깔에 따라 밝은 빨강색(산성)이면 호산구, 짙은 보라색(염기성)이면 호염기구, 옅은 분홍색(중성)이면 호중구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막상 염색을 해보니 면역세포들 중에서는 호중구가 가장 많아서 전체 면역세포의 50~70%를 차지합니다. 우리가 백혈구라고 불리는 세포들의 대부분이 호중구(Neutrophil)입니다. 호중구는 특히 세균이나 진균에 특화된 존재들로, 온갖 방법으로 이들을 물리칩니다. 이들은 세균을 먹어치우고, 이들을 녹이는 단백질 효소들을 배출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거미줄 구조의 DNA 덫을 방출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병원체들과 맞붙고는 장렬히 전사합니다. 호중구들의 수명은 겨우 몇 시간에서 며칠에 불과할 정도로 짧습니다. 엄청난 숫자들로 밀어붙이면서 동귀어진(同歸於盡)하는 셈이죠. 이렇게 죽은 호중구들은 고름이 되어 배출됩니다. 사실 호중구뿐 아니라 대부분 면역세포들의 수명은 일주일 내외로 매우 짧습니다. 면역세포가 전투 후에도 오래도록 살아남는다면, 완전히 죽지 않은 세균이나 바이러스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우리 몸은 매우 효율적이면서도 꽤나 냉정합니다. 이렇게 호중구가 주로 세균과 곰팡이성 진균류에 반응한다면, 호산구(Eosinophil)와 호염기구(Basophil)는 주로 기생충처럼 더 큰 감염체들을 퇴치하고 외부 단백질에 반응하여 염증 반응을 일으켜 더 많은 면역세포들을 불러 모으기도 합니다.
골수에서 만들어지는 또다른 면역세포로는 단핵구(Monocyte)가 있습니다. 단핵구는 그 자체로도 면역 작용을 수행하지만, 다시 변신하여 대식세포나 수지상세포로도 변화합니다. 대식세포(Macrophage)는 말 그대로 병원체를 잡아먹는(食) 커다란(大) 세포라는 이름처럼 우리 몸의 면역세포 중 가장 커다란 세포입니다. 큰 몸집으로 세균과 같은 병원체들을 엄청나게 잡아먹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지요. 대식세포가 세균을 잡아먹는 동영상에서도 보여지듯이 이들은 세균들을 악착같이 따라가서 모조리 먹어치우는 면역계의 진공청소기입니다. 물론 세균 잡아먹기는 대식세포만의 특성은 아닙니다. 호중구도 병원체를 잡아먹지요. 하지만 그저 먹어서 없애버리는 호중구와는 달리 대식세포는 먹어치운 병원체의 단백질을 조각내어 세포막 표면에 걸어둠으로써 림프구들이 적들의 정보를 빨리 파악하여 대처할 수 있게 돕는 역할도 합니다. 이렇게 침입한 적들의 특성을 파악해 다른 면역세포들에게 광고하는 세포들을 일컬어 항원제시세포(Antigen Pregenting Cell, APC)라고 합니다. 대식세포와 수지상세포는 대표적인 항원제시세포랍니다.
단핵구의 또다른 분화형인 수지상세포(Dendritic cell)는 나뭇가지(樹枝) 모양(狀)의 세포란 이름처럼 작은 돌기들이 무수히 많이 뻗어나온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지상세포는 대표적인 APC 중 하나로, 병원체를 먹고 난 뒤 항원이 될 단백질 조각들을, 마치 나뭇가지에 잔뜩 달린 열매처럼 달아매고는 림프절로 이동해 T세포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세포입니다. 특히나 수지상세포는 아직 미성숙한 T세포를 성숙시켜 제 몫을 하는 림프구로 키워내는 지도 교관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합니다.
골수에서 유래된 세포들은 주로 선천면역에 관계된 세포들입니다. 선천면역이란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던 면역 능력으로, 주로 나와 남을 구별해 내 것이 아닌 세포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면역학적 반응입니다. 선천면역은 외부 침입에 대해 매우 빠르고 예민하게 대응하는 편이지만, 상대가 해로운지 아닌지를 따지기보다는 무조건 공격하기 때문에 때로는 이 증상이 지나쳐 알레르기처럼 불필요한 면역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즉, 별다른 병원체도 아니고 특별히 위험한 것도 아닌데, 이를 ‘외부물질’이라는 이유만으로 해로운 적으로 인식해 총공격을 퍼부으니 남들은 별 이상이 없는 땅콩이나 고등어, 복숭아에도 심각할 정도의 염증반응을 일으키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는 것이죠. 또한 선천면역계 세포들은 특정 병원체를 지정해 공격하는 것이 아니기에 한 번 공격한 대상을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그저 내가 아닌 것이 내 몸 속에 있으니 무조건 공격할 뿐이죠. 이렇게 선천면역을 담당하는 세포들은 어쩌면 주위에 있을 법한, 예민하고 용감하지만 다소 융통성 없이 고지식한 사람을 떠올리게도 만듭니다.
선천면역 세포들이 제 역할을 해주는 덕분에 우리는 온갖 세균과 바이러스, 곰팡이와 기생충이 득실득실한 세상에 살면서도 대부분 별 탈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후천 면역을 담당하는 세포들, 즉 림프구성 면역세포들입니다. 우리가 백신을 통해 집단 면역을 도모하는 것도 바로 이 림프구성 면역세포의 능력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참고 문헌
1) [An estimation of the number of cells in the human body], Eva Bianconi etc. Ann Hum Biol. Nov-Dec 2013: 40(6)
2) [일하는 세포], 시미즈 아카네 글/그림, 학산문화사, 2016
3) [인체 면역학 교과서], 스즈키 류지 지음/장은정 옮김, 보누스, 2021년
4) [혈액학, 3판], 대한혈액학회 지음, 범문에듀케이션,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