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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 과학 Mar 08. 2018

1905년, 아인슈타인의 기적의 해

아인슈타인이 세상을 바꾼 3편의 논문

1879년 3월 14일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한명이 태어났습니다.

바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입니다. 


그는 불과 스물여섯 살에 과학사에 길이 남을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20세기를 바꾼 논문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일까요?


빛이 ‘파동’이란 논리를 깨다.


 “빛은 입자인가, 파동인가?” 이 질문은 수천 년 동안 과학자를 괴롭혀 온 숙제였습니다. 

어느 한쪽도 다른 한쪽을 압도할 만한 논리를 내세우지 못하고 항상 엎치락뒤치락 했습니다. 17세기에는 크리스티안 호이겐스의 ‘빛의 파동론’이 지지를 받다가, 18세기에는 아이작 뉴턴의 ‘빛의 입자론’이 지지를 받았습니다. 19세기 초에는 영국의 토마스 영이 빛의 회절과 간섭을 실험적으로 밝혀내자 다시 ‘빛의 파동론’으로 전세가 역전됐습니다.

광전 효과 / By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CC BY-SA 3.0 (Wikimedia)

이러한 상황에서 1905년 3월, 아인슈타인은 ‘빛의 입자론’을 지지하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가 《물리학 연보》에 제출한 논문은 ‘빛의 창조와 변화에 관한 과학적 관점에 대하여’라는 다소 평범한 제목이었습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빛은 ‘진동수에 비례하는 에너지를 갖는 광양자(광자)들의 흐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빛이 금속표면에 있는 전자를 떼어낼 때, 광자와 전자의 일대일 충돌에 의해 전자가 튀어나온다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진동수가 큰 광자는 전자를 떼어낼 수 있지만, 진동수가 작은 광자는 아무리 빛의 세기가 세거나 밝기가 밝아도 전자를 떼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인슈타인은 빛이 입자이면서 어떻게 파동의 성질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광양자 가설 논문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원자론’, 브라운 운동을 수학적 수식으로 증명하다.


두 번째 논문은 1905년 5월에 발표됐습니다. 


그때까지 원자는 아무도 직접 관찰하거나 검출하지 못했습니다. 나노미터(nm) 단위의 원자를 직접 볼 수 있는 기계는 없었고, 원자론을 지지하는 증거들은 모두 간접적인 것들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의 화학자 오스트발트는 “당신의 머릿속에 원자론(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뤄져 있다는 이론)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어선 안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원자의 존재를 풀 실마리는 뜻밖에도 화학자나 물리학자가 아닌 식물학자에게서 나왔습니다.


1827년 영국의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은 현미경으로 물에 떠 있는 꽃가루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꽃가루에서 나온 작은 입자가 수면 위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 다른 종류의 꽃가루들 역시 특정한 운동 패턴을 보였습니다.

이에 대해 브라운은 꽃가루의 운동이 물의 흐름이나 증발 때문이 아니라 꽃가루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식물의 꽃가루뿐 아니라 유리, 금속 같은 무생물도 똑같이 패턴으로 운동했습니다.

그 뒤 사람들은 액체나 기체안에 떠서 움직이는 미세한 입자의 불규칙한 운동‘브라운 운동’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브라운 운동의 비밀을 푼다면 미시세계에 대한 인류의 지식을 더 확장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분자의 움직임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 브라운 운동

(이미지 출처 : Lookang Author of computer model Francisco Esquembre, Fu-Kwun and lookang CC BY-SA 3.0)


1905년, 아인슈타인은 한 번의 충돌로 입자를 움직일 수는 없지만 초당 수백만 번의 무작위적인 충돌로 브라운이 관찰한 꽃가루 입자의 비틀거림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작은 입자들의 충돌에 맥스웰의 기체분자이론을 적용했고, 그 입자들은 브라운이 꽃가루에서 관찰한 것과 같이 움직일 것이라는 내용을 수식으로 증명했습니다. 그는 입자의 크기를 예측하고, 입자와 부딪히는 물 분자의 크기에 따라 물 높이가 변할 때 그 높이들마다 입자의 수가 몇 개씩 존재할 것인가를 설명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수학적 정리만으로 원자론 논쟁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직접적인 실험으로 드러난 결과가 아니라 이론적인 풀이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년 뒤. 프랑스 물리학자 장 페렝은 새로 개발된 암시야현미경을 이용해 수면의 높이 별로 입자 수를 헤아려 아인슈타인이 계산한 것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예측이 옳았던 것입니다.


특수상대성이론, 16살 때 빛을 쫓았던 꿈의 결실


세 번째 논문은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1905년 6월에 발표한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주제는 아인슈타인이 16세 소년일 때 꾸었던 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나는 꿈 속에서 빛을 뒤쫓아가곤 했다. 아주 빠르게 빛을 따라가면 빛과 속도차이가 없어져 빛이 멈추고 만다.
특수상대성이론 / by Spiros1976 CC BY 4.0 (Wikimedia)

아인슈타인은 꿈을 통해 생긴 딜레마를 풀려고 노력했습니다. 빛이 멈추지 않으려면 빛의 속도가 더 빨라지거나, 아무리 빨리 뒤쫓아가도 빛과의 속도 차이가 좁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소년으로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887년, 미국의 과학자 앨버트 마이컬슨과 에드워드 몰리의 실험으로 빛의 속도는 언제, 어디서든 초당 30만km의 속도로 일정하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상대성 원리’에 따라 빛의 속도로 뒤쫓는다면 앞서가는 빛은 멈춰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고민을 계속했고, 1902년 스위스연방 특허국에 입사해서야 답을 찾아냅니다. 그는 ‘절대시간’이라는 개념은 없으며, 시간의 흐름은 물체가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이론의 핵심가정은 ‘빛의 속도는 언제나 일정하다’는 것 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어느 공간, 어느 좌표계, 어느 속도에 있더라도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아가 특수상대성이론에는 길이, 질량, 시간, 공간, 에너지 등이 불변이 아니라 물체의 속도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면 변한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내용의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물질과 에너지는 E=mc2 이라는 공식에 따라 서로 변환 가능한 등가성을 가진다고 밝혔습니다. 이 논문이 《물리학 연보》에 발표되자 일부 전문가들은 격찬했지만 대부분은 거의 이해할 수 없어 불평을 샀습니다.


특수상대성이론을 내놓은 지 10년만인 1915년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을 내놓습니다. ‘등속’ 운동에 한정돼 있던 특수상대성이론을 ‘가속’ 운동까지 포함시켜 일반이론으로 정립했습니다. 


1905년, 한해 동안 그가 발표한 광양자가설(3월), 브라운운동이론(5월), 특수상대성이론(6월) 관련 논문은 불과 몇 개월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사학자들은 1905년을 ‘아인슈타인의 기적의 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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