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문』을 읽고
종종 사람들로부터 책을 추천받거나 선물로 주고받는다. 메모장에 추천받은 책의 제목을 기록하거나 선물 받은 책을 책장·바닥에 내려놓는다. 흔한 풍경이다. 책을 펼치고 새로운 세계에 접속하는 순간 평범한 풍경은 특별한 경험이 된다. 어떤 맥락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문』을 추천받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 필요한 책을 친구가 더 잘 알았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주인공 소스케는 무기력하다. 도쿄에서 평범하게 일을 하고, 전철로 출퇴근을 한다. 집에서 아내 오요네와 식사를 하는 것 외에 특별한 일은 없다. 동생의 학비 문제를 그저 바라만 보고, 숙부로부터 돌려받아야 하는 돈을 요구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는다. 새해의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한 공기도 그를 비껴간다. 그는 자신과 무관한 세상의 활동에 마지못해 휩쓸린다 생각하고, 실제로 이렇다 할 새로운 희망이 없는데도 공연히 주위에 휩쓸린다 생각한다.
소스케는 희미한 존재이다. 표정이 지워진 그의 얼굴을 그려본다. 그는 아주 쉬운 글자임에도 근래(近來)의 '근'자와 금일(今日)의 '금'자를 잘 떠올릴 수 없어 오요네에게 묻는다. 종이에 써놓고도 어쩐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단다. 현재에 발을 딛지 못하고 정처 없이 부유함을 상징할 테다. 소스케와 오요네 부부는 세상과 단절된 채 자신들만의 세계에 몰입하여 살아간다.
이윽고 날이 저물었다. 대낮에는 그다지 인력거 소리가 들리지 않는 동네는 초저녁부터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부부는 평소처럼 남포등 아래로 다가갔다. 넓은 세상에서 자신들이 앉아 있는 곳만 환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환한 등불 아래서 소스케는 오요네만을, 오요네는 소스케만을 의식하면서 남포등의 힘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사회는 잊었다. 그들은 매일 밤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자신들의 생명을 발견하고 있었다.
일상에 아무런 동요가 없는 삶이다. 나는 한동안 그런 삶을 경멸했다.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흔들리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발걸음을 새로이 내딛는 매 순간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을 한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소스케의 삶은 내게 다소 맥 빠지게 느껴졌다. 내 눈이 번쩍 뜨인 것은 그의 과거 이야기가 등장하는 14장에 이르러서였다. 소스케가 한결같이 고요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마치 과거의 나를 마주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무렵 소스케의 눈은 늘 새로운 세계에만 쏠려 있었다. 그래서 자연이 한차례 사계절의 색을 보여준 뒤에는 다시 작년의 기억을 불러내기 위해 꽃이나 단풍을 맞이할 필요가 없어졌다. 강렬한 생명으로 살았다는 증서를 끝까지 움켜쥐고 싶었던 그에게는 살아 있는 현재와 앞으로 생겨나려는 미래가 당면 문제였지, 사라져 가는 과거는 꿈과 마찬가지로 가치 없는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벗겨지기 시작한 많은 신사와 적막하기 그지없는 절을 다 둘러보고는 빛바랜 역사로 검은 머리를 돌릴 용기를 잃어버렸다. 잠에 취해 멍한 옛날을 배회할 만큼 그의 기분은 시들지 않았던 것이다. (...) 그는 이렇게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것이, 일의 성패와 상관없이 지금까지 보지 않고 지내온 살아 있는 세계의 단편을 머리에 채워 넣는 듯해 왠지 유쾌했다.
오직 새로운 것만을 좇던 나는 감정적으로 격하게 반응하기 바빴다. 새롭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켜켜이 쌓이자 조금은 심드렁해지기도 했다. 언젠가부터는 많은 것들에 일희일비하는 나의 모습에 빠져있기보다 조금은 멀리 떨어져 냉정한 시선을 갖출 필요도 있다는 생각을 곧잘 하게 됐다.
소스케는 이런 새로운 자극으로 한동안은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한차례 고도(古都)의 냄새를 맡으며 걷는 중에 곧 모든 것이 단조로워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아름다운 산의 빛깔과 맑은 물의 빛깔이 자신의 머리에 처음만큼 선명한 모습으로 비치지 않는 것을 어딘가 불만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뜨거운 젊은 피를 안은 그는 그 열기를 식혀줄 짙은 숲을 만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 정열을 다 태울만큼 열렬한 활동과도 물론 만나지 못했다. 그의 피는 세차게 고동치며 쓸데없이 근질거리는 그의 몸속을 흘렀다. 그는 팔짱을 끼고 앉아 사방의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제 이렇게 케케묵은 곳에는 질렸어"하고 말했다.
젊은 시절의 소스케는 삶에 대해 한없이 열정적이었다. 절친한 친구 야스이와 그의 동거녀 오요네와 만남으로써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친구를 배신하고 오요네를 만났고,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둘은 지탄받았고 고립된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지금의 삶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었다.
소스케는 과거 외곬으로 행동했던 기억을 씁쓸하게 생각한다. 나 역시 그동안 좁은 세계에 갇혀 다른 것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반성을 할 때가 있다. 소스케의 현재가 나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과 필연이 빚은 조화로 소스케는 다시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된다. 부채감 속에 친구를 만날 것인가, 피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아내인 오요네에게 이야기조차 하지 못한 채, 홀로 추운 겨울의 절(寺)로 들어가 답을 구하지만 해결될 리 만무하다. 그리고 소스케는 문(門)을 맞닥뜨린다.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하는 목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그는 어떻게 해야 이 문의 빗장을 열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수단과 방법을 머릿속에서 분명히 마련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열 힘은 조금도 키울 수 없었다. 따라서 자신이 서 있는 장소는 이 문제를 생각하기 이전과 손톱만큼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닫힌 문 앞에 무능하고 무력하게 남겨졌다.
소스케는 문 앞에서 옴싹달싹하지 못하고, 이도 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한다. 답이 저절로 구해질 리 없다. 항상 그렇듯,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빈 손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계절은 바뀌고, 화창한 햇살이 유리로 비쳐 든다. 오요네는 드디어 봄이 돼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소스케는 답한다. "응, 하지만 또 금방 겨울이 오겠지".
내 삶만큼은 다르고 특별할 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감정이나 생동감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만이 남아있다. 소스케도 그랬을 거다. 하지만 하늘에서 바라보는 지상의 풍경과 같이 많은 우리네의 삶은 마치 점(點)과 같다. 그리 유별나지 않고, 두드러지지 않고, 때로는 보이지조차 않는다. 권태로움은 여기에 자리한다.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 모험을 성공하면 불안하고 불안정한 지금의 나약한 자신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와 같이. 하지만 삶은 도돌이표이다.
새로운 시간의 문이 열릴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냥 미뤄질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거나 움직이려 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
역자의 말이다. 나 역시 새로운 문이 열릴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문 앞에 서 있고, 다가가고, 주위를 맴돌고, 두드리는 것은 결국 스스로 하는 것이다. 점(點)으로 자리한 내 삶은 그나마 이와 같은 행위들 속에 다른 점들과 연결될 수 있다. 점과 점은 연결되어 선(線)이 되고, 또 다른 선과 닿아 다시 면(面)을 빚을 수 있다고 믿는다. 오늘도 문 앞을 서성인다. 그리고 두드린다. 그것이 비록 허망할 지라도 말이다.
이 책을 읽은 나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에게 나쓰메 소세키의 『문』을 추천한다. 평범한 풍경이다. 부디 특별한 경험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