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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월 Nov 28. 2024

느리게 사는 기술


누군가 내게 “당신은 바쁜가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잠시 고민 끝에 대답한다. “아니요, 느려요.” 느리게 사는 삶은 현대 사회에서 마치 죄악처럼 여겨진다. 바쁘게 사는 것이 유능함의 증표가 되고,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삶이 성공의 기준이 되어버린 시대다. 하지만 나는 느림 속에서 비로소 발견되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얼마 전, 오래된 시계방을 지나치다가 문득 멈춰 서게 되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낡은 진열장 안에는 수십 개의 시계들이 줄지어 있었고, 각기 다른 박자로 초침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계조차 같은 속도로 가지 않는데 왜 우리는 모든 것을 한 가지 속도로 맞추려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느림은 단순히 움직임의 속도가 더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는 것, 듣는 것, 그리고 느끼는 것의 깊이를 더한다. 빠르게 걷다 보면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을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천천히 걸으면 그 꽃의 색, 모양, 향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효율적으로 끝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느리게 듣기 시작하면, 말의 이면에 숨겨진 감정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종종 느림의 중요성을 배운 한 장면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재봉틀로 손수 옷을 만드시는 모습을 지켜본 기억이다. 바늘이 천 위를 오가며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소리, 천천히 이어지는 실밥 하나하나,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탄생한 옷의 따뜻함. 만약 그것이 공장에서 빠르게 생산된 옷이었다면 그 옷에는 그런 이야기가 담기지 않았을 것이다. 느림은 이야기를 만든다. 그리고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


느림은 또한 선택의 자유를 준다. 빠르게 살다 보면 선택의 순간이 너무 짧아 깊이 고민할 여유가 없다. 하지만 느리게 사는 사람은 선택의 폭을 넓힌다. 그는 스스로의 시간을 주체적으로 사용하며,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물론 느리게 산다는 것이 게으르다는 뜻은 아니다. 느림은 무기력한 정지가 아니라, 의도적인 속도의 조절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위해 과감히 멈추는 용기다.


요즘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핸드폰 대신 커피잔을 먼저 든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과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게 느린 아침을 보내다 보면, 하루라는 길 위에서 길을 잃지 않고 제대로 걸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빠른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느림은 곧 여유다. 여유는 깊이 있는 삶을 만들고, 그 깊이는 결국 더 나은 선택으로 이어진다. 오늘도 나는 느리게 걷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로소 나 자신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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