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는 씬파일러, 비금융 데이터
1. 이 글은 커넥터스가 만드는 큐레이션 뉴스레터 '커넥트레터'의 12월 23일 목요일 발송분입니다.
미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를 하루 앞둔 목요일의 엄지용입니다.
커넥트레터 구독자 여러분은 영화 좋아하세요? 저는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직업병인지 영화를 미디어업자 관점에서 분석하는 이상한 버릇이 생기긴 했지만요.
최근의 화제작인 <스파이더맨 : 노웨이 홈>도 얼마 전에 봤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시놉시스에 있는 내용만 가지고 온다면, ‘과거’ 스파이더맨의 주적들이 다른 차원인 멀티버스에서 현재의 공간으로 넘어와서 생긴 일을 이번 영화에서 다룹니다.
요컨대 2002년 개봉한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삼부작에 등장한 빌런, 2012년 개봉한 마크 웨브 감독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이부작에 등장한 빌런들이 존 와츠 감독의 세 번째 스파이더맨 작품인 <스파이더맨 : 노웨이 홈>에 모입니다.
2시간 30분이라는 꽤 긴 상영시간을 자랑하는 이번 영화는 곳곳에 지난 20년 동안 이어진 스파이더맨 시리즈에 대한 경의를 담았습니다. 팬심이 없다면 풀지 못했을 디테일이 곳곳에 숨어있는데, 그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단언컨대 이번 작품을 쿠키영상까지 본 사람이라면 과거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길 겁니다. 나아가 <어벤저스>나 <아이언맨>과 같은 마블 유니버스의 다른 작품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요. 실제로 현재 넷플릭스 인기 영화 순위 TOP10을 보면 순위권에 든 8개 작품이 과거 서로 다른 감독들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인데 말 다했죠.
마블은 이번 작품을 통해 이미 십수년 전에 수명이 다해 죽어버린 스파이더맨 콘텐츠를 성공적으로 부활시켰습니다. ‘멀티 유니버스’라는 세계관을 통해서요. 저 같은 미디어업자는 이런 걸 보면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습니다. 와, 마블 진짜 잘한다.
현실 세계로 돌아와서 제가 주로 만드는 ‘정보 전달형 콘텐츠’는 통상 길어야 발행 시점에서 3일안에 수명이 끝납니다. 이후에는 광고를 하든, 바이럴이 터지든 어떤 트리거가 발생하지 않는 한 다시 안 읽힙니다.
그런데 옛날 콘텐츠라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의성과 무관하게 지금 읽어도 의미 있는 콘텐츠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이렇게 죽어버린 과거의 좋은 콘텐츠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다시 살려낼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했죠.
안타깝게도 저에게 마블처럼 ‘멀티 유니버스’를 구축할 만큼의 역량은 없습니다. 여긴 거의 종합예술 수준입니다. 다만, 1인 크리에이터에 맞는 소소한 시도는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커넥트레터가 대표적인 예죠. 자, 오늘도 과거 콘텐츠를 열심히 살려볼까요. 뉴스픽 시작합니다.
신한은행이 ‘배달 플랫폼’을 시작했습니다. 22일 ‘땡겨요’라는 이름의 배달 플랫폼을 정식 오픈한 것인데요. 금융권에 평소 관심이 없던 분이라면 대체 왜 은행이 갑자기 ‘배달앱’인가 의아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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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즘 은행에서 은행일 아닌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은 대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신한은행에 앞서 우리은행도 뱅킹앱 안에 ‘편의점 배달’ 서비스를 녹였고요. NH농협은행도 마찬가지로 뱅킹앱 안에 ‘꽃배달’ 서비스를 추가했습니다. 물론 이 두 사례는 외부업체 제휴 측면에서 서비스를 연동하는 수준에서 접근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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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신한은행의 배달앱 출시는 종전의 사례와는 다르게 사뭇 진지합니다. 신한은행이 ‘직접’ 앱을 만들어버렸거든요. 한국경제의 보도에 따르면 신한은행이 배달앱 개발에만 무려 140억원을 투자했다고 하는데요. 대체 신한은행은 배달앱을 통해 뭘 하고 싶은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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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배달 플랫폼’에 지금 진입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미 이 시장은 ‘과점 구도’가 공고하거든요. 배달의민족과 요기요, 쿠팡이츠로 대표되는 3개 플랫폼이 ‘1강 2중’ 구도로 시장을 갈라 먹었습니다.
와이즈앱의 2021년 6월 기준 발표에 따르면 배달의민족, 요기요, 쿠팡이츠의 월간 순사용자수(MAU)는 각각 1263만명, 564만명, 367만명입니다. 이 정도면 이미 대한민국에서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배달앱’을 쓰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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뺏어오거나 뺏기거나. 시장 점유율을 만들기 위해서는 ‘돈’을 쓸 수밖에 없는 구도가 여기 나옵니다. 실제로 배달의민족과 요기요, 쿠팡이츠 중에서 제대로 ‘돈’을 벌고 있다고 평가받는 업체는 없습니다. 모두가 파괴적인 마케팅, 운영비용을 소모하면서 여전히 경쟁하고 있습니다.
최근 돋보이는 건 요기요인데, 무슨 치킨 한 마리를 7000원씩 매일매일 할인해주고 있습니다. 원래 배민을 쓰던 저도 요기요의 쿠폰 팡팡에 반해서 주 사용앱을 바꿔버릴 정도입니다. 쿠팡이츠는 또 어떤가요. 쿠팡이츠가 던지고 배달의민족이 받은 ‘단건배달’ 경쟁은 필연적으로 배달비용이 튀어오를 수밖에 없는 구조를 일반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판에 어설픈 자본으로 뛰어들었다가는 등 터지기 십상이죠.
물론 신한은행이 ‘어설픈 자본’은 아닙니다. 큰 자본이죠. 신한은행의 배달앱도 나름 시장에 먼저 진입한 업체들과 경쟁하기 위한 비책은 품은 것 같습니다. 당장 땡겨요는 앱이용 고객에게 첫 주문시 사용 가능한 5000원 쿠폰, 두 번째 주문시 사용 가능한 5000원 쿠폰까지 총 1만원 쿠폰을 뿌렸고요. 음식점 가맹점에게는 입점 수수료, 광고비를 받지 않는 정책을 세웠습니다. 중개 수수료는 ‘2%’로 업계 최저 수준을 내걸었죠.
우려가 있다면, 이런 신한은행의 비책이 그렇게 새로워 보이진 않는다는 겁니다. 시장 선도 배달앱들도 ‘쿠폰 팡팡’ 뿌리고 있긴 매한가지입니다. 이 지옥 같은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신한은행은 앞으로도 당장 뿌린 1만원 쿠폰 이상의 쿠폰을 팡팡 태워야 할 것이고, 이거 다 비용입니다.
저렴한 수수료도 새로워보이진 않습니다. 지자체 사이에서 안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유행처럼 번진 공공 배달앱도 수수료는 저렴합니다. 하다못해 다른 민간업체 후발주자 배달앱인 ‘위메프오’가 2019년 론칭하면서 처음 내걸었던 것도 저렴한 수수료(5%)였습니다. 깔때기를 달자면 지금 위메프오는 나름 시장 점유율 4등(MAU 22만명, 2021년 6월 기준, 와이즈앱)으로 선방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기간 3위인 쿠팡이츠(MAU 367만명)와의 격차를 넘기엔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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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체 왜 신한은행이 ‘배달앱’을 한 것인가 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한은행도 이런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닌 것 같고요. 그도 그럴 것이 신한은행은 배달앱으로 돈을 벌 생각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신한은행은 보도자료를 통해 “땡겨요는 사업을 통한 수익보다는 플랫폼 참여자 모두에게 이로운 혜택을 제공해 배달 플랫폼에서의 상생을 실현하는데 초점을 맞췄다”고 했죠.
상생 좋죠. 그런데 신한은행이 140억원의 돈을 투자해가면서까지 ‘배달앱’을 만든 이유가 ‘상생’뿐이라 한다면 조금 아쉽지 않을까요. 당연히 신한은행의 속내는 있습니다.
그 이유는 ‘씬파일러(Thin Filer)’라는 키워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씬파일러란 말 그대로 ‘데이터가 없어서(파일이 얇아서)’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의사와 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실제 돈을 값을 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신용을 평가할 데이터가 부족해서 금융상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이죠. 2021년 상반기 기준 국내 씬파일러의 숫자만 총 1280만 7275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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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네이버, 토스와 같은 기술 기반의 인터넷은행들이 제 1금융권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씬파일러 금융 시장’에 주목합니다. 이들을 포용하는 상품을 적극 출시하기 시작합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씬파일러의 신용을 평가하고, 충분히 대출금을 갚을 여력이 있는 이들을 산정하여 2금융, 사금융에 비해 저렴한 이율에 대출 상품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네이버파이낸셜이 우리은행, 미래에셋캐피탈 등 금융사와 제휴하여 스마트스토어 사업자 대상의 신용대출 상품을 확대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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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기존 금융업체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도 빅테크의 움직임에 대응하고자 씬파일러를 키워드로 금융상품을 만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죠. 근데 웬걸. 상품을 만들려고 하니 뭐가 비어있는 게 보이네요. 바로 ‘비금융 데이터’입니다. 네이버는 입점 판매자의 매출을 알 수 있고, 배달의민족은 음식점의 매출을 알 수 있는데, 은행은 그런 데이터가 없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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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은행이 ‘배달앱’을 시작한 배경도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배달앱에는 대표적인 씬파일러로 분류되는 음식점주들의 데이터가 모입니다. 이들의 데이터가 충분히 축적된다면 신한은행은 음식점주를 위한 맞춤형 금융 상품을 론칭할 수 있겠죠.
관련 사례는 이미 있었습니다. 연합인포맥스의 보도에 따르면 신한은행은 최근 배달대행업체 생각대로의 모회사 인성데이타에 450억원의 금액을 투자하고 2대 주주가 됐습니다. 이후 신한은행은 지난 10월 ‘생각대로’ 데이터를 활용하여 라이더 대상의 소액신용대출 상품을 출시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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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남아있는 의문이 있다면 왜 신한은행이 굳이 실패 부담을 감수하고 ‘직접’ 배달앱을 론칭하는 강수를 뒀냐는 겁니다. 기존 배달앱과 제휴를 하는 방법을 쓸 수도 있었을텐데요. 실제로 2020년 하나은행은 배달의민족과 제휴하여 배달의민족 입점 사업자 대상의 소액 간편 대출 상품을 출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한은행 역시 이미 충분한 규모를 만든 배달앱과 제휴를 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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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씬파일러를 위한 금융 상품 출시를 위한 ‘비금융 데이터’ 확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신한은행의 배달앱 출시도 마냥 이상해보이진 않습니다. 앞으로 신한은행에게 숙제가 있다면 이번에 시작한 ‘배달앱’을 얼마나 잘 성장시킬 수 있느냐겠죠. 성장하지 못한 배달앱에는 충분한 데이터가 모이지 못하는 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코로나19로 F&B업계가 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정부의 방역조치 거부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오는 사업자들과 관련한 소식이 심심찮게 보일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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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오프라인 영업이 강제로 막힌 상황에서 성장한 사업이 사실 ‘음식배달’입니다. 그런데 요즘 음식배달이라고 해서 상황이 쉬운 건 아닙니다. 보험료 부담, 라이더 수급 부족 등으로 배달대행요금은 치솟았습니다. 치솟은 배달요금이 음식점주에게 직접적인 부담감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결국 소비자에게 부가하는 배달비, 판가 인상까지 연결되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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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어려운 시대에 배달로 돈을 버는 음식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배달 전용 메뉴를 따로 빼서 브랜딩하는 사업자가 있고요. 온오프라인 통합 재고가 아닌 ‘온라인 재고’를 별도 관리하여 효율을 끌어올리는 사업자도 있습니다. 굳이 단건배달의 속도전에 집중하지 않고 묶음배달로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서 배달비용을 절감하는 사업자도 있습니다. 같은 배달을 하더라도 어찌 보면 별거 아닌 ‘디테일’에서 그 차이가 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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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이런 디테일을 다루는 콘텐츠를 구독자 여러분에게 좀 더 많이 전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 더 현장에 녹아들 필요가 있겠죠. 오늘 커넥트레터는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구독자 여러분 모두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다음주 목요일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