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 드라마가 재미없는 이유

핍진성과 인지부조화

by 김수철


며칠 전 저녁, 와이프가 옆에서 심리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화면을 힐끔 보니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에 대한 내용이었다.

원래 익숙한 주제였지만, 그 순간 묘하게 한 주제가 떠올랐다.


요즘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느끼는, 그 특유의 이질감.


영화관에 가서 작품을 보는데 몰입이 되지 않고,

감정의 흐름이 매끄럽지 않고,

장면과 장면이 뜬금없이 이어지고,

PPL이 튀어나오면 ‘아… 또 광고네…’ 하는 탄식이 나오고,

주연배우의 멋있는 장면 위주로 흐름이 돌변하면

문득 내 마음속에서 작은 균열이 생긴다.


이건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요즘 영화·드라마를 보며 인지부조화를 느끼고 있다.


서사와 감정이 “진짜 “인 것처럼 다가오려 하는데,

우리 뇌는 그게 ”가짜“라는 걸 너무 빨리 알아채버린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적 몰입이 붕괴된다.


그리고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핍진성(verisimilitude)**이라는 개념을 짚지 않을 수 없다.



1. 핍진성: 이야기의 ‘그럴듯함’을 결정하는 심리적 설득력


핍진성은 이야기 속 세계가 실제처럼 느껴지는 정도를 말한다.

사실 여부와는 다르다.

사실이 아니어도, 그럴듯하면 된다.


핍진성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네 가지가 필요하다.


1. 인물의 심리와 행동이 일관적일 것

ex) 소심했던 캐릭터가 갑자기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으로 돌격?!


2. 사건이 이야기의 규칙을 지킬 것

ex) 판타지 영화인데 갑자기 휴대폰을 켜서 위치 추적?!


3. 감정의 흐름이 단계적으로 쌓일 것

ex) 원수처럼 서로 죽일 듯이 싸우다가 갑자기 키스?!


4. 장면의 목적이 서사와 맞아떨어질 것

ex) 처절한 생존 사투를 벌이고 갑자기 떡볶이 먹는 장면이?!


이 네 가지가 충족되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감정의 세계로 끌려 들어간다.

“저럴 수 있지”라는 자연스러운 이해가 생기는 순간 이야기는 현실처럼 작동한다.


하지만 이 기반이 무너지면 관객의 뇌는 아주 빠르게 “이건 가짜”라고 판단한다.


이것이 우리가 최근 콘텐츠를 볼 때 특유의 피로감과 흥미 저하를 느끼는 시작점이다.



2. 왜 요즘 작품들은 이렇게 ‘가짜처럼’ 느껴질까?


첫 번째 이유는 제작환경의 변화다.


• PPL을 넣기 위해 뜬금없는 장면을 끼워 넣어야 하고

• 주연배우의 이미지를 소속사의 요구대로 만들어줘야 되고

• 제작비 감소로 이야기의 깊이가 얇아지고

• OTT 플랫폼에 맞추기 위해 속도감 위주의 구조가 강요되고

• 회차를 늘리기 위한 불필요한 장면이 삽입되고

• 감독의 의도보다 시장 논리가 우선되면서 서사가 왜곡된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서사보다 돈이 중요한 콘텐츠“를 만들어낸다.


콘텐츠는 더 화려해졌지만, 이야기는 더 가벼워졌다.


그 결과 관객은 화면 속 감정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명확하게 감지한다.

이것이 바로 인지부조화다.


“이건 진짜라고 말하는데… 왜 이렇게 가짜 같지?”



3. 문제는 제작 환경만이 아니다


여기서 관점이 하나 더 필요하다.


요즘 영화/드라마가 가짜 같아진 것이

“제작자들이 못 만들어서”만은 아니다.


우리가 변했다.


현대 관객은

• 긴 호흡의 서사에 집중하기 어려워하고

• 숏폼의 빠른 보상 구조에 익숙해지고

• 감정을 깊게 느끼기보다 짧게 소비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 천천히 쌓이는 관계보다 즉각적 감정 폭발을 좋아한다


즉, 이제 많은 사람들이 감정의 구조보다 감정의 순간을 소비한다.

이런 관객의 변화는 콘텐츠의 제작 방식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결국 시장은 소비자에게 맞춰 작품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이야기는 더 단순해지고, 감정은 더 즉각적으로 자극적으로 변하고,

핍진성을 유지하는 ‘정서적 설계’는 사라진다.


다시 말해, 핍진성이 사라진 콘텐츠는

시장의 요구에 맞춰 변화한 ‘우리 모습’의 반영이기도 하다.



4. 핍진성이 무너지면 왜 인지부조화가 생길까?


우리의 뇌는

일관된 감정 흐름,

예측 가능한 서사,

자연스러운 심리 과정을 선호한다.


이건 생존을 위한 기본적 메커니즘이다.

정신과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맥락이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본다.


그런데 작품이 불균형하게 설계되면,

• 감정은 ‘진짜처럼’ 포장되어 다가오는데

• 구조는 ‘가짜다움’을 드러내고

• 우리의 마음은 이를 즉시 알아채며 몰입에서 빠져나온다


이 충돌이 바로 인지부조화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영화관에서 느끼는 그 묘한 피로감, 허탈감, 몰입의 실패는

이 인지부조화의 결과다.



5.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결국 ‘진짜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다


핍진성은 시간과 맥락을 요구한다.

하지만 현대의 감정 소비 방식은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핍진성 없는 콘텐츠는 단순히 허술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변화를 반영한 거울에 가깝다.


“진짜 감정은 느리다”

“진짜 관계는 불편하다”

“진짜 서사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단순한 진실을 잃어버린 시대.

우리는 점점 더 빠른 감정, 가벼운 공감, 즉석 서사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래서 요즘 영화가 재미없어진 건

단순히 영화 탓만은 아니다.


그건

‘진짜 같은 이야기’를 견딜 수 있는 우리의 내구도가

함께 줄어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